사람들 속에 묻혀 나 자신이 잘 보이지 않을 때면 나는 곧잘 신천을 거닌다. 특히 도시가 싫을 때나 자신을 이기기 힘들 때는 필수코스가 되었다. 내 삶의 근처에 신천이 있어 함께 흐를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신천은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40년 이상犬?늘 가슴 한켠을 지켜주는 따뜻한 젖줄이었다.
발가벗은 채 까맣게 뒹굴던 개구쟁이 시절의 웃음과 시린 겨울날 열세식구 빨랫감을 이고 별이 돋을 무렵에야 돌아오던 어머니의 눈물이 얼룩진 곳, 지금도 신천에 나가 앉으면 저 멀리 색필처럼 추억은 와서 무너진 돌다리를 건너고 있다.
한때 검게 타들어 가던 강물은 신천 둔치의 꾸준한 개발로 이제는 천연기념물 330호인 수달이 나타날 정도로 깨끗한 2급수의 물이 되었다. 곳곳에 야생화 단지가 조성되고 봄이면 유채꽃이, 가을이면 메밀꽃이 장관을 이룬다. 또한, 곳곳에 설치된 운동기구들을 이용하여 남녀노소 모두 건강을 위해 땀 흘리고 있다.
내가 즐겨 찾는 곳은 조야교와 팔달교 사이의 하류 지점이다. 잘 닦인 자전거길을 건너 좀 더 강물 가까이 내려가 강의 숨결을 듣는다. 이태 전, 태풍 '매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아직도 상처를 훤히 드러내고 있는 그곳에서 나는 나의 정신적인 목마름을 푸는 것이다.
언제나 한결같은 물소리를 듣고, 사계절 다르게 채색되는 물빛을 바라본다. 그러다 보면 이따금 일상에서 잃어버린 내 꿈의 날개는 왜가리들과 함께 너울대고, 고방오리, 알락오리들의 물장난도 따라하며 곰실거린다. 육신의 목마름이야 한 컵의 물만으로도 해결될 수 있겠지만 정신의 목마름은 이런 자연이 아니면 무엇으로 풀어내랴.
현대인들은 누구에게나 많은 스트레스가 있기 마련이다. 필연적 혹은 본의 아니게 받는 스트레스도 많겠지만 알고 보면 자신의 성격 탓일 경우가 현저히 많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마음 밑바탕 색깔이 희지 않은 다음에야 다른 사람들의 색깔이 묻어오면 더욱 혼탁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떠한가, 같이 박수라도 쳐주는 친구가 있어야하고 아니면 고함이라도 질러댈 노래방에 달려가거나 그것도 모자라면 밤새 술을 마셔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망각제가 다소 함유된 인스턴트 처방에 불과하다. 그 시간이 흐르고 나면 결국 생각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마음은 다시 괴로워진다.
새벽녘, 강변에 나가 수초 사이 피어나는 물안개를 보라. 저 멀리 팔공산자락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라. 아니 태양은 굳이 떠오르지 않더라도 청잿빛 하늘로 밝아오는 아침 기운으로 심호흡을 하고 내 마음의 바탕 색깔을 하얗게 변화시켜 보라. 그러면 타인들의 색깔이 나에게 깨끗하게 번져옴을 느낄 것이다.
저물녘 겨울 강둑도 좋다. 선 채로 적멸에 든 갈대들의 모습은 또 어떤가! 늘 눈부신 모습으로 서녘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빛은 탈색된 갈대들을 축복처럼 비춘다. 어느새 느릿느릿 파고드는 저 건너 산그늘! 그 그늘도 훔쳐와 마음속에 척 앉혀 보라. 그러면 여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던 경전 한 구절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나 중심을 지키며 유유히 흘러가는 저 강물은 말한다. 아무리 큰 절망이라도 살아있기에 겪는 은혜라고, 상처로 상처를 덮으며 천천히 하류로 흘러가라고, 뻘물이 다가오면 그 뻘물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신을 더욱 맑히고, 돌부리를 만나면 제 몸을 흩어 노래 한 소절로 바꾸어 보라고….
육신의 단련을 위해 끊임없이 뛰며 땀을 흘리듯 우리의 정신을 단련시키기에도 게을러서는 안 될 것이다. 굵은 땀을 흘리며 큰 깨달음은 얻지 못할지라도 송골송골 이마를 적실 만큼은 언제나 사색해야 한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나 역시 짙은 원색으로 돌아가려는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서 나는 최면을 건다. 내가 가진 색깔은 저 흐르는 강물처럼 투명해야 한다고…. 오늘 저녁 신천은 그 넉넉한 가슴에 첼로를 품고 있는 듯하다. 저음으로 나직이 깔려오는 독주가 나를 계속 붙들고 있다. 아마도 생상의 '백조'가 아닐까!
정경화 (시인)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李대통령, 대북전단 살포 예방·사후처벌 대책 지시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대통령실 "국민추천제, 7만4천건 접수"…장·차관 추천 오늘 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