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에 원전이 들어선 지 올해로 22년. 그 세월 만큼 주민들은 속아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다.군사정권은 주민의사는 상관없이 우격다짐식이었고, 90년대 이후는 정부가 지키지도 못할 약속만 무더기로 남발했다.
◇울진-속고 산 22년
1983년 (옛)월성군에 경북 최초의 원전이 들어섰다. 그후 지금까지 울진 1, 2호기 월성 2, 3, 4호기 울진 3, 4, 5, 6호기 등 모두 10기의 원전이 운전 중이다. 건설 예정인 신월성 1, 2 호기와 울진 7, 8, 9, 10호기까지 합치면 경북 원전은 16기로 늘어난다. 경북은 국내 최대 원전 지역이지만 주민들이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다. 정부는 90년대 이전 사업 경우 부지 선정부터 건설까지 모두 몰래 진행했다.
울진 주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속아도 철저하게 속았다"고 정부를 원망했다. 1979년 첫 원전사업에서 대규모 공장을 주겠다며 군민들을 속였다. 1990년 1, 2호기 건설이 끝나자마자 3, 4호기 건설 계획을 주민 의견 수렴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1991년 정부가 방폐장 후보지 중 한 곳으로 울진을 끼워 넣으면서 마침내 주민 분노가 폭발했다. 방폐장 설치를 반대하는 현수막과 담벽 글씨가 온 마을에 나붙었다. 반대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국도를 점거하고, 한전 울진변전소에 화염병을 던져 5개 읍·면에서 2일간 정전사태가 일어났다. 54일간의 시위로 군민 10명이 구속됐다.
97년 5, 6호기에 이어 99년 7, 8, 9, 10호기 부지 승인까지 정부의 원전사업도 걸림돌이 없었다. 특히 99년 원전 부지 승인 당시 정부는 반대 주민들을 달래려고 약속한 14개 지원 사업을 절반도 추진하지 않았다. 원자력안전기술원 울진지소, 한국해양연구소 울진지소, 원자력특수대학, 울진종합병원 등 모든 '당근'이 거짓말로 드러난 것.
지원한 것도 허울뿐이다. 울진군 근남면은 성류굴 등의 관광지로 유명하다. 한때는 부자 마을로 통했지만 79년 정부 원전 계획때부터 주민들도 모르게 원전 부지로 묶여 이후 22년간 개발의 그늘에 신음했다. 근남면 산포3리 장광웅(65) 이장은 "개발 제한 지역으로 묶였던 마을은 울진에서 유일하게 방파제조차 없는 곳으로 전락했다"고 한탄했다.
원전 지원 제도는 주민들을 두 번 울리고 있었다. 원전 발전량에 따라 수입의 일부(연간 50억~100억원)를 전기세 보조금, 주민 복지 사업 등으로 환원하고 있지만 주변 5km에 이내에만 국한돼 상당수 주민들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원전이 들어선 북면은 울진 최북단으로 강원도와 맞닿아 있는 곳. 이 때문에 5km 기준에 따라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지역은 울진 10개 읍· 면 중 단 3곳에 불과하다.
주민들은 고용 효과도 '빛 좋은 개살구'라고 했다. 일용직이 대부분이어서 원전 건설만 끝나면 곧바로 '공황' 상태에 빠진다는 것. 군민을 우선 고용했다는 정부 발표도 겉치레에 불과했다. 한수원에 따르면 울진 5, 6호기 건설현장 인력 고용은 총 4천164명으로 이 중 군 출신은 1천652명(40%)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한수원 등의 정규 직원은 단 259명으로 나머지 1천 374명 전부가 일용직이다.
울진은 등 뒤로 두 손을 뻗으면 손이 마주 닿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다는 것.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데만 2시간 걸리는 교통 오지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4차선 도로가 없는 지역이기도 하다. 내륙과 울진을 연결하는 36번 국도는 봉화 현동에서 멈춰 10년 넘게 표류하고 있고, 포항~동해간 7번 국도는 울진만 쏙 빼고 모든 공사를 마무리한 상태다.
또 주민들은 "농·어업 판로도 막혔다"고 하소연했고, '사고' 스트레스도 상당해 원자로 가동이 중단될 때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한다는 것. 상당수 주민들은 속고만 살아 온 원전 22년의 고통이 극에 달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방폐장 유치로 확실히 보상받아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기성면은 지난해 5월 20세 이상 주민 44%가 방폐장 건설에 찬성해 정부에 유치 청원서를 제출한 곳이다. 지난 11일 방폐장 부지로 거론되고 있는 기성면 삼산리. '아직도 이런 곳이…'였다. 군내에서 유일하게 도로 포장조차 안 됐다. 한 주민은 "조금만 눈이 와도 마을버스가 들어오지 않아 시장조차 나갈 수 없다"며 "원전 지원금이라도 받아서 마을을 개발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삼산리를 비롯해 근남면 산포리, 북면 검성리 등 유치청원서를 제출한 마을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주민들은 결국 '잘 살고 싶어서' 방폐장 유치를 원하고 있었다. 울진발전포럼 전주수 대변인은 "선진국 방폐장 지역들은 원전시설에 따른 각종 지원책을 적절히 활용해 경제를 살렸다"며 "울진도 방폐장 유치와 연계해 해묵은 숙원 사업을 해결하는 데 주력한다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영덕과 포항
포항 청하면은 지난 91년 방폐장 유치 후보지 중 한 곳이다.11일 오후 면사무소에서 만난 주민들은 취재팀에 '핵'자도 꺼내지 말라고 했다. 91년 12월부터 꼬박 3년을 지옥에서 보냈다고 몸서리쳤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상처가 남았다고 했다.
주민 대표들은 취재팀에 3년치의 신문기사 스크랩 북을 보여줬다. 주민들이 얼마만큼 고통받았고, 정부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컸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다치고, 부서지고, 경찰에 잡혀가고, 순박한 시골이 난장판이 됐죠. 정부는 병원, 학교 등 부대시설에다 엄청난 투자를 하겠다고 했지만 시골을 쑥대밭으로 만든 정부를 누가 믿겠어요. 3조를 줘도 싫습니다". (김종린 포항시의원)
"청하면은 주민 모두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관광휴양지이기도 합니다. 개발보다는 보존을 원합니다. 생업에 종사하며 번 만큼 살아가고픈 게 주민들의 마음입니다". (신포항농협 한진욱 조합장)
지난 12일 오후 영덕 남정면 우곡리 마을회관. 마을 주민 10여명이 모여 최근 방폐장 열기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우곡리 역시 과거 방폐장 후보지 중 한 곳.
"정부의 약속 믿을 수 있어", "방폐장 유치하면 주름진 살림살이가 펴질까", "지난 89년과 2003년 두 번이나 마을이 들썩거렸고, '너'와 '나' 편가르기만 했지, 남은 게 뭐 있어". 우곡리 박성렬 이장은 "정부는 과거 방폐장 이야기를 내놓을 때마다 마을을 엄청 발전시켜준다고 했지만 전부 말뿐이었다"고 했다.
주민 김정중씨는 "2003년 정부는 방폐장 유치지역에 대해 향후 20년간 양성자가속기, 한수원 이전, 지역지원사업 유치, 지역개발금 등 2조원 이상을 지원하겠다는 설명회를 여러번 했지만 이를 믿는 주민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또 주민들은 "정부가 과거 방폐장 유치를 위해 매일 노인들을 버스에 태워 온천, 울진 원전 등지로 관광시켜 주고, 식사 한끼로 유치 서명하는 작태를 벌였다"며 "이번에도 이 같은 작태가 재현될지도 몰라 걱정"이라고 했다. 그래도 주민들은 방폐장이라도 유치해 쪼그라진 마을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을 토로하고 있었다. "다시 속일 리가 있겠어. 믿어봐야지 뭐."
특별취재팀=기획탐사팀 이종규·이상준기자 사회2부 포항·임성남 영덕·최윤채 울진·황이주 기자 정치2부 최재왕기자
사진:울진군 북면 검성리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방폐장 유치 찬반 토론을 벌이고 있다.이상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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