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진도(선행학습)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빨리 배우는 것을 대개 '선행학습'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원래 교육학에서 통용되는 용어가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학교 수업보다 진도를 빨리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조기 진도'라고 불러야 한다. 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남보다 한발 앞서 배워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착각일 따름이다.

일부 우수한 학생에게는 조기 진도가 다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대부분 역기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많다. 학교 수업 집중도를 떨어뜨리고 학습 의욕을 상실하기 쉽다. 또한 처음 배울 때 철저히 이해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그 부분을 틀릴 수 있다. 아무리 쉬운 단원이라도 충분한 시간을 들여 깊이 있게 이해하고 연습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학

모든 교과가 그렇지만 특히 수학은 한 단원의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서 응용 문제로 그 내용을 깊이 있게 다져야 다음 단계로 쉽게 넘어 갈 수 있다. 여러 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어느 한 부분만 소홀히 해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가 어렵다. 많을 수험생들이 현재 배우고 있는 과정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충분한 연습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은 학습의욕을 상실하게 되고 수학에 흥미를 잃게 된다. 중3 때 10-가, 나를 배운다거나 고1 때 수Ⅰ'Ⅱ에 몰두한다고 수학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한 단계씩 시기적절하게 다져나가지 않으면 다음 단계에 무엇을 배우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수학은 첫 단계에서 어설프게 이해하거나 단순히 문제 풀이 위주의 패턴에 집중하다 보면 수능시험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다소 생소한 유형이 나오면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 모의고사에서는 고득점을 하는데 실제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는 수험생들 중 상당수가 조기 진도로 그 전 단계의 기초를 충분히 이해하고 연습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영어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영어에는 조기 진도라는 말을 적용할 수 없다. 예컨대 문법에서 부정사, 동명사, 분사와 같은 준동사는 중학교에서도 배우고 고등학교에서도 배운다. 출제되는 문제의 어휘와 난이도에 차이가 날 따름이다. 일부 학자들은 어린 나이에 외국어를 시작해야 2개 국어 동시 구사 능력이 배양된다고 주장한다. 중'고교 나이만 돼도 논리로 외국어를 배워야 하기 때문에 원어민 수준에 이르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기 교육이 지나칠 경우 많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영어 조기 교육 열풍은 오히려 생산성 면에서의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 가령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뿐만 아니라 그 글을 이해할 수 있는 교양과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가능한데 내포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수능 영어에서도 고득점을 하기 위해서는 영어 실력뿐만 아니라, 언어 영역에 적용되는 풀이 방법을 알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말 어휘 실력과 독해 능력이 없으면 고급영문의 해석과 이해도 어렵다.

일반적으로 저학년일수록 한 군데 이상 학원에 다니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얻는 것은 별로 없는 경우가 많다. 많이 벌여 놓기보다는 하나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암기하는 것이 더 낫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 본문만 다 암기해도 엄청난 학습이 된다.

▶언어, 사회, 과학

언어는 조기 진도보다 일부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논술, 철학, 독서지도 등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몇몇 학원에서는 고액의 수강료를 받고 논술과 심층면접 등의 강의를 하기도 한다.

어린이와 중'고교생을 상대로 철학 강의와 독서 지도를 하는 경우 나이와 지적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어려운 내용과 딱딱한 논리를 다루는 사례가 많다. 정도가 지나치면 독서가 주는 재미를 잃기가 쉽다.

심층면접이나 논술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평소 신문, 잡지 등을 통해 시사적인 쟁점들을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교과서에 나오는 사회과목의 다양한 기본 개념들을 먼저 이해하고 나서 그 내용을 현실 문제와 접목시켜 사고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대비책이다.

과학 과목의 경우 일부 학원에서 중학교 때부터 영재학교나 특목고를 목표로 어려운 과정을 미리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과정들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할 경우 흥미와 학습의욕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 고교생의 경우 심층면접에 대비한다면서 대학 과정의 어려운 내용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대학에서 출제된 과학 과목의 기출문제를 검토해 보면 고교 과정을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교과서 내용을 먼저 이해한 뒤 심화학습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윤일현(송원학원 진학지도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