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우르르 아이들의 그림자가 흩어졌다. 그림자는 달빛을 따라 이리저리 달리며 긴 골목길의 모퉁이나 고만고만한 한옥의 문간으로 숨어들었다. 술래는 외등 아래 꼼지락거리는 그림자를 찾아 까치발을 하며 두 눈을 반짝였다.
담벼락에 바짝 붙어 서 있던 나는 행여 숨소리조차 달빛을 받아 그림자로 일렁일까 조바심을 냈다. 아이들을 찾느라 내게서 멀어져 가는 술래를 엿보며 참았던 깊은숨을 내쉬었다. 문득 알 수 없는 희열과 안도감으로 충만해졌다. 아이들의 소란함을 멀리한 채로 작은 평화가 어린 계집아이에게 찾아드는 달밤이었다.
며칠째 아들녀석이 친구에게서 얻어온 도안을 들이밀며 조르기에 십자수를 놓고 있다. 익살스러운 표정의 농구선수 그림인데 한 땀 한 땀 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니 꽤 재미있고 그럴 듯해 보인다. 완성하고 나면 쿠션을 만들까 베개를 만들어 줄까 여러 가지 궁리가 많아진다.
나는 선천적으로 뜨개질이나 바느질에 아주 서투르다. 여고생 무렵, 친구 따라 조끼를 떠본다고 시늉을 내보았지만 그 방면으로는 영 엉터리였다. 가르치던 친구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가사실습 숙제는 늘 언니와 엄마의 차지였다.
재봉은 더 엉망이었다. 여러 해 전 문화센터 교육과정에 등록해서 다닌 적이 있었는데 서투른 나를 대신해서 내 몫은 친구가 미리 다 해주곤 했다. 덕분에 3개월간 열심히 출석은 했어도 나는 재봉틀에 실도 꿰지 못하는 까막눈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내가 우연히 십자수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도안부터 시작해서 쿠션도 만들고 액자도 만들다가 나중에는 구슬을 잔뜩 얹은 면사포를 쓴 신부까지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대단한 작품들은 내 으쓱한 자만을 실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물로 전해지기까지 했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재봉틀 바늘에 실을 꿰는 순서를 기억하지 못하고 뜨개질하던 목도리의 코를 빠뜨려 되풀기 일쑤이던 내가 십자수를 척척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의 입장에서 보면 무조건 '척척'은 아니었다.
십자수라는 것이 바늘만 쥐면 누구나 할 수 있을 만큼 쉽다지만 내심 버거운 일이었다. 형광펜으로 도안에 일일이 표시를 해가며 수놓고 있는 부분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한 자리에서 다리에 쥐가 나도록 몇 시간씩 꼼짝하지 않으며 집중을 해야하는 노력도 필요했다. 그러나 그 시간만큼은 더없이 고요한 세상이었다.
마음이 고되거나 생각이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 날, 나는 십자수 보따리를 펼쳐든다. 나 자신이 스스로도 통제되지 않을 때 말없이 수를 놓고 있으면 가족 중 누구도 내 심경을 눈치채지 못해서 좋다. 그저 십자수에 심취해 있으려니 여길 뿐 별다른 트집을 잡지 않는다.
보따리를 펼쳐 놓고 있다고 해서 그 복잡한 심정들이 달라지지야 않겠지만 십자수 작은 천 조각 뒤에 우선 숨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천천히 마음의 상태를 곱씹어 보며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칼날에 베인 듯 쓰라린 속을 어쩌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바늘을 손에 쥐면 시나브로 평안 속으로 잦아들게 된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나 아픔을 바늘 끝에 숨겨 수를 놓다 보면 어릴 적 술래잡기 놀이 속으로 고스란히 옮겨 앉는 듯하다. 달빛이 만들어내는 그늘 뒤에서 짧게나마 누리던 고요는 비할 데 없는 안온함이었기에.
이제는 더 이상 술래잡기를 할 수도 없고 몸을 숨길 담 모퉁이도 허락되지 않을 나이를 끌어안고 있다. 다락방이나 손이 쉬이 닿지 않는 벽장에 숨어들던 시절을 지나온 지도 오래다. 삶의 무수한 술래들을 피해 잠시 숨을 곳이 지금은 보잘것없는 보따리여도 뭐 어떨까. 비록 소소한 바늘 끝에 어지러운 심사를 숨겨서라도 나를 온전히 가눌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은신처가 또 어디 있으랴.
이경임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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