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잘나가는 장관직을 사임한 사람이 있다면 대중들은 뭐라고 말할까? 건강상의 이유도 아니고 정치적 책임 때문도 아니니, 모르긴 해도 국가 막중대사를 책임진 사람이 사사로운 일에 연연한다고 곱게 보지는 않을 것 같다.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사표를 던지는 사람은 봤어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사의를 표하다니 우리네 정서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실제 그런 선택을 한 인물이 있다. 미국이 낳은 천재 중 한 명으로 불리며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가 홀연히 가정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일'과 '삶' 사이에서 '삶'을 선택한 그의 행동은 미국 사회에 신선한 감동까지 불러일으켰다. 로버트 라이시는 왜 갑자기 가정으로 돌아갔을까? 평소 일에 묻혀 살던 그가 어느 날 막내딸로부터 "밤에 퇴근하고 돌아오면 깨워 주세요. 아빠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알고 싶어요"란 말을 듣는다. 얼굴도 보기 힘들 만큼 바쁜 아버지에게 무심코 건넨 딸의 말은 그로 하여금 조금 더 늦어지면 가정을 돌볼 수 없을 거라는 위기감을 느끼게 했고, 곧바로 사표를 던지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돌아간 집에서 그는 만족했을까? 하지만 후일담은 기대만큼 감동적이지 않다. 그 자신은 일을 버리고 가정으로 돌아갔지만 아내는 여전히 직장을 나가야 했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스케줄 때문에 부모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데 인색해져 있었다. 이것이 현실이다.
젊은 시절 일에 파묻혀 지내다 어느 날 돌아다보면 아이들은 '어느새 저렇게 컸나!' 싶게 자라 있게 된다. 뒤늦게 등장한 아버지는 반가운 존재이기보다 이미 평화롭게(?) 짜여진 가족관계 속에서 불편한 틈입자일 뿐이다. 아버지는 퉁명스런 자녀가 섭섭하고, 자식들은 '돌아온' 아버지의 관심이 불필요한 간섭으로만 느껴져 부담스럽다.
현대 경쟁사회에서 '일'과 '가정'은 양립하기 힘든 구도이며, 남성의 경우 '당분간'을 이유로 십중팔구 일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슬프게도 아이들은 아버지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가족이라해도 지나온 시간만큼 축적된 추억이 있어야 관계의 밀도가 높아진다. 우리 사회도 매월 육아데이를 정하고, 가족친화적 기업문화를 마련하는 등 아버지를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일의 중요성을 비로소 인식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함께할 '미래'를 기약하며 '현재'를 희생하기보다는,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지금 함께' 지켜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땅의 아버지들이여! 지금부터라도 매일 몇 십 분 자녀와 눈 맞추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시라.
정일선(경북여성정책개발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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