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10월 26일 대전형무소. 냉기가 뼛 속까지 스며드는 감옥 안 콘크리트 바닥 위에 병색이 완연한 한 사내가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었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잔혹한 고문의 후유증이 육체를 갉아먹은 지 벌써 2년. 10개월 만 버텼으면 광복의 희열을 맛볼 수 있었겠지만 꺼져가는 생명의 빛을 켜기에 그는 너무 지쳐 있었다.
월해(月海) 우병기(禹丙基·1903~1944). 애국지사들의 모임인 무진회(無盡會)에서 활동하던 그는 1944년 3월 5일 5명의 동지와 함께 일본 도쿄에서 체포됐다. 일제는 그에게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을 붙여 징역 7년형을 선고했다.
잊혀졌던 독립운동가 우병기는 해방된 지 꼭 60년이 흐른 뒤에야 다시 살아났다. 정부는 제66회 순국선열의 날(17일)을 맞아 우병기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꼭 61년 만이다.
1903년 경북 월배군 달성면 상인동(현 대구 달성구 상인동)에서 태어난 그는 윤상태, 안희제 씨가 설립한 사립학교인 덕산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가족들과 함께 양산 손잡이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다가 1942년 도쿄에서 일경에 체포됐다. 수차례에 걸쳐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는 이유였다.
조카 우종묵(83·대구 수성1가) 씨는 우병기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모습을 본 유일한 생존자. 1942년 청진으로 우 선생의 면회를 갔던 것. 우씨는 "삼촌은 평소 차분하고 과묵한 성격이었다"며 "면회소 철창을 사이에 두고 차마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못한 채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번 훈장 추서가 우 선생 가족들에게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동안 우병기 선생의 행적이 기록된 자료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
아들 우종성(63) 씨는"10여년 전부터 아버지의 행적을 추적했지만 대전형무소에 일어난 화재 때문에 관련 서류가 소실, 증명하는데 애를 먹었다"며 "부산에 있는 국가주요문서보관소를 수 차례 방문한 끝에 겨우 아버지의 행적이 담긴 법원 판결문을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 독립운동가 우병기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모습을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조카 우종묵씨가 16일 해질 무렵 창가에서 고인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이상철기자 finder@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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