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그림과 술

화가 친구를 둔 권 선생은 친구 화실을 방문하여 술을 한 잔 마시기도 하고 평소에 생각했던 그림에 대한 입장을 피력하기도 하며, 친구의 그림에 대한 평도 곧잘 했는데, 어느새 자기도 그림에 대한 조예가 깊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어느 날 화가 친구와 술을 거나하게 하고 집에 갔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딸아이 그림이 척 있더란다.

전문가로서 가만히 보니 너무 평범하고 미숙한 점이 많아서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우선 검정색으로 전체를 다듬고 보니 아이 그림이 너무 시커멓게 되어서 이래선 안 되지 하고 사람의 얼굴을 새빨갛게 칠해 포인트를 주었단다. 잘 됐다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집안에 야단이 난 것이다. 아내가 막내를 혼내고 있는데, 언니 그림을 '호작질'해서 그림 숙제를 망쳤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딸아이는 울고 있고, 막내 딸아이는 극구 부인하며 안 했다고 하는데 아내는 다그치며 언니 숙제를 망쳤으니 어쩔 거냐고 막내를 닦달했다. 대충 했으면 그냥 넘어갈 건데, 사태가 심각한지라 권 선생 "자기가 했다"고 실토를 했단다. 매맞는 막내 아이가 누명 쓴 것도 미안하고, 빨리 사태를 수습하는 게 옳다 싶어서 "내가 했소이다" 하니 마누라 왈 "아이쿠, 화가 친구랑 만날 술이나 먹고 다니더니 이젠 딸아이 그림 숙제까지 망치네" 하더란다. 우는 딸아이를 보고 "동생이 잘못해서 그랬다"고 하라고 하니 딸애는 거짓말 못하겠단다. 그러면 "아빠가 술 취해서 그랬다고 할래" 하고 겨우 달래서 학교에 보냈단다. 당사자의 심각한 이야기를 듣는 우리들은 잘했다고 손뼉 치며 재미있어 했다.

화가들도 술 먹고 그림을 그려 실수하는 때가 종종 있어 그 상황이 절로 연상돼 그 이야기를 안주 삼아 또 한 잔 하는 것이다. 술이 취해 화실에 오면 괜히 객기도 부리고 싶고, 대가가 된 심정으로 그려 논 그림에 가필을 하거나, 큰 붓으로 쓱 지우거나, 심할 때는 손바닥에 물감을 묻혀 마구 휘저을 때가 있는 것이다.

물론 아침에 일어나며 후회하기도 하고 왜 그랬을까 하고 자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화랑 큐레이터가 그림 보러 오는 날도 술 먹고 휘두른 그림 때문에 난감해 한 적이 있다. 큐레이터가 오기 전 그걸 고치느라고 애먹은 일을 생각하면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후배들과 술 한 잔 하면 노래 부르고, 종이를 펴라 하고선 취화선을 하는데….

어려운 세상 이런 재미도 없으면 무슨 맛으로 살까 하고 서로 위안을 얻는 것이다. 예부터 예술을 하기 전 먼저 애술(愛酒)하라던가?

정태경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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