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우리'가 되는 해를 위하여

재작년 말경,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매일신문입니다. 선생님이 이번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셨습니다". 믿기지 않던, 그래서 몇 번을 되묻기도 했던 희소식이었다.

2006년 병술년의 시작을 맞으니 그때의 들떴던 마음이 다시 되살아 나는 듯하다. 나를 시단에 내놓은 시는 노숙자를 소재로 한 '집시가 된 신밧드'였다. 서울역 지하도에서 잠든 노숙자를 희망의 눈으로 보고 썼던 시였다. 그런데 그것은 여느 노숙자를 보는 시각과는 제법 차이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노숙자라 하면 자본의 벽으로 상징되는 '도시 빌딩'과의 충돌로 추락한 자, 일자리와 소비력을 상실한 자, 사회라는 제도권으로부터 먼 변방으로 떠밀려난 자로 인식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함께 동정과 연민의 코드를 연상시키곤 한다.

그러나 '집시가 된 신밧드'는 그들을 향해 일체의 연민이나 동정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시는 '그들이 따뜻해 보인다'는 말로 끝을 맺기까지 하니 말이다. 어느날 가까운 지인이 "왜 추운 겨울, 지하도 바닥에 잠든 노숙자가 따뜻해 보이냐"는 질문을 해왔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추웠기 때문입니다. 노숙을 하던 그가 나보다 따뜻해 보일 만큼, 거기 서있던 나는 추웠거든요". 사실 내가 춥다고 말한 것은 사회와 타인에 대한 한기, 즉 소외 때문이었다. 노숙자에 비하면 반듯한 직장과 가정을 모두 가진 나였지만,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도시와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냉소가 나를 춥게 만든 이유였다.

더 깊게는 급진적인 정보화와 물신주의로 인해 '함께'라는 개념과 '울타리'라는 개념이 붕괴되어 가고 그것으로부터 '우리'라는 개념이 쇠퇴해 가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느덧 우리는 '개인화'란 병리적 현상을 겪고 있다.

이로써 자신이 아닌 자들은 나의 테두리를 벗어난 타인으로 간주되고, 그것은 모두 소외란 이름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것은 타인을 직접적으로 외면함으로써 가하는 소외가 아니라, 개인화에 따른 이기주의가 만들어 내는 간접적인 사회적 현상에 의해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볼 때 시 속의 노숙자나 우리 모두는 소외자라는 점에서 일직선 상에 놓인 자들이다. 단지 당장 이불을 따뜻하게 덮고 잔다는 것으로, 정상적인 끼니를 때운다는 것으로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 이유로 우리가 그들에게 선심성 연민이나 일방적인 동정의 시선을 보낸다는 것은 매우 어색한 일이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들보다 더 추울 수도 있으며, 그들보다 더 배고플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이 외상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외계층이라면 그를 포함한 나나 우리 모두는 내상의 고통으로 분류된 소외계층에 속한다. 우리 모두는 허물어진 '우리'의 울타리를 다시 엮어 세우려는 노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당선소감에서 "소외된 자들의 입이 되겠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세상엔 소외 아닌 것들이 없으므로 나는 세상 모든 것들의 입이 되어 침묵만이 희망이 아니라는 것을 외치겠다고 말한 셈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모든 군상들이 느끼는 한기를 누그러뜨리는데 조금이라도 힘이 된다면 거기에 내가 시를 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병술년 새해가 밝았다. 자꾸만 허물어지는 '우리'의 울타리를 세우기 위해 서로에게 따뜻한 '우리'가 되어주는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서영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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