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의 겨울은 조용하다. 이미 여름의 인파가 사라진 바닷가는 얼씨년스러움과 황량함이 가득하다. 차가운 날씨탓에 파도는 조금 거세진 것 같지만 사실 여름의 그것과 다름이 아니다. 그러나 그 바다를 안고 사는 어민들에게는 겨울이 분주하다.
호젓한 풍광속의 울진 근남면 산포리 바닷가는 조용함 안에 어민들의 바쁜 손놀림이 들어앉아 있다.
◆겨울은 농어기가 아닌 출어 준비기
산포리는 빼어난 절경으로 전국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인 7번 국도를 따라 울진읍 남쪽 약 5~10분 거리에 있는 소 어촌이지만 전국의 낚시꾼과 피서객들이 한번은 다녀갔을 정도로 이름난 곳이다.
마을 뒤쪽으로는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인 망양정과 살아 움직이는 듯한 마을 앞 거북바위, 명사십리 백사장이 있는 해수욕장, 늦겨울에서 봄까지 이어지는 숭어 잡이 등이 유명하다. 특히 숭어 잡이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의 대표적 생계수단이었다.
숭어 잡이 어로장(선장 겸 고기잡이에서 총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인 남재구(52) 씨는 어망을 짜면서 '겨울은 어한기라서 한가롭겠다'는 기자의 첫 인사에 그냥 웃었다.
"그렇지 않아요. 봄에 쓸 숭어 잡이 투망은 3개쯤 필요한데 겨울동안 집에서 직접 제작을 하지요. 한 개를 제작하는 데 하루 8시간씩 1주일 정도 걸리고 실 값만도 25만 원 정도 들어가요"라고 했다.
물론 낚시점에서는 기계로 만들어 파는 싼 가격대의 그물도 있다. 그러나 기계제작 그물은 잘 뜯어지는데다 굴곡이 심해 물에 가라앉는 속도가 직접 제작한 것보다 늦다고 했다. 이 때문에 이 동네 50여 가구 주민들은 겨울철에 직접 그물을 만든다. 그래서 겨울은 바쁠 수밖에 없다.
◆대를 잇는 어로장
대표적인 연안 어종으로 성어 길이가 60~70cm가 넘는 숭어는 수온이 낮아지면 눈이 어두워져 수면 가까이에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이 특징이어서 잡는 방법도 다양하고 독특하다.
고전적인 방법은 그물몰이.
9대째 숭어 잡이를 해온 김영국(74)·순태(44) 씨 부자는 "숭어들이 눈이 어두워져 수면 위로 떠오르면 물빛이 불그스레하게 변하는데 이를 보고 언덕이나 산 중턱 등지에서 망을 보던 어로장이 '후려라'하고 소리치면 바다 길목에서 기다리던 여러 척의 어선들이 그물로 숭어 떼를 둘러 싸 건져 올린다"고 했다.
하지만 이젠 이 방법은 옛날 얘기가 됐다. 여느 어촌과 마찬가지로 산포리도 배를 탈 수 있는 젊은 어부가 거의 없어졌기 때문.
게다가 지난 1998년 5월 7일 새벽 숭어를 잡으러 나갔다 간첩선으로 오인받아 군인들로부터 총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물몰이는 사실상 폐업상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23년째 숭어 잡이를 하고 있는 순태씨를 중심으로 50~60대의 젊은이(?)들이 겨우 한 척의 배로 명맥만 유지해 오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쉬운 것이 투망법. 이 방법은 숭어가 산란을 위해 연안으로 들어오는 3~5월 중순까지가 적기다. 포인트만 잘 잡으면 한 시간에 20~30마리도 거뜬하고 육질이 부드러워 횟감으로 인기다. 이 마을에서 투망의 대가로도 불리는 순태 씨는 "결혼 전인 80년대 후반에는 투망으로 고기를 잡아오면 구멍가게를 하던 어머니가 회로 만들어 피서객들에게 팔았고 결혼 뒤에는 아내와 어머니가 직접 횟집을 열어 숭어회를 팔고 있다"고 했다.
순태 씨의 아내 류문경(43) 씨는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 경운기에 수족관을 설치해 숭어를 운반해 오지만 처음 결혼때만 해도 신랑이 잡은 숭어가 죽을까봐 양동이에 바닷물을 채워 백사장을 오갔다"며 "얼마나 힘이 들던지 기억하기조차 싫다"고 했다.
숭어 잡이 방법 중 가장 손쉬운 것은 훌치기. 숭어가 무리지어 모여 있는 곳에 삼발 갈쿠리 바늘을 던져 고기를 잡는 훌치기는 저항하는 숭어의 힘이 대단해 이 손맛에 재미를 붙인 낚시꾼중에는 숭어 훌치기만을 고집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다고 한다.
◆숭어 잡이에 얽힌 애환
이 곳 어민들의 생계가 숭어잡이였던 만큼 애환도 적잖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8년 전 총격사건이다. 남재구 씨 등 어민 12명이 새벽녘에 2척의 배로 염전 앞바다에 숭어잡이를 나갔다 총격을 당해 1명이 죽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본지 1998년 5월7일 27면 보도). 해안경계 근무를 서던 군인들이 간첩선으로 오인한 것. '어민들이 달아나 발포했다'는 당시 군 당국의 발표에 대해 어민들은 '봄 철 연안 숭어 잡이는 수십년간 해오던 어로작업인 만큼 군인들이 조금만 더 신중하게 지역내 지형지물과 어업행태를 파악하고 있었더라면 참사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건'이라며 소송을 제기, 승소했던 아픈 기억이다.
당시 부상을 입었던 남재구 씨는 "생계 때문에 그 사건 뒤에도 숭어를 잡으러 다니고 있지만 으스스한 생각이 들어 새벽에는 나가지 않는다"며 "총격사건 후유증에다 인력난 등으로 그 후 그물몰이 방식의 숭어잡이는 사양길에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울진.황이주기자 ijhwang@msnet.co.kr
사진 : 겨울이 내려앉은 울진 근남 산포리 바닷가. 드넓은 백사장과 동해의 푸른빛이 하늘과 맞닿는다. 산포리 망망대해를 제대로 보려면 망양정에 올라야 한다. 사진은 망양정에서 바라본 바다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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