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 있는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 신비한 종소리 때문에 만들어진지 1천300 년이 지난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종을 칠 때 나는 '에밀레'라는 소리에 얽힌 전설은 초등학생 이상의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얘기가 됐다. 종을 만들 때 쇳물을 끓이면서 시주받은 아기를 넣었고, 종이 완성됐을 때 종소리가 시주받은 아기가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와 비슷해 이를 본 따 '에밀레종'으로 불렀다는 전설이다.
하지만 이 소리가 아기의 울음소리가 아니고 용의 울음소리라면, 그것도 고래에 놀란 용 울음 소리라면 '에밀레' 전설에 익숙한 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고래연구소 김장근 소장의 말이다.
"종을 매달기 위해 용모양으로 만든 고리(이것은 우리나라 종에만 있는 특징이다)를 용뉴(龍紐)라고 하는데 이 용을 특별히 포뢰(浦牢)라고 불렀다. 이 포뢰는 바다에 사는 경어(鯨魚·고래)를 만나면 놀라 크게 비명을 지른다. 그래서 포뢰 모양을 만들어 종 위에 앉히고 고래 모양의 당(撞·종치는 도구)으로 종을 치면 크고 우렁찬 소리를 낸다. 범종의 소리를 경음(鯨音)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같은 이유다." 에밀레종의 신비한 소리는 고래를 만나 크게 우는 포뢰의 소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김성구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며 "고래연관성은 종의 유래설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고 있는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 관장은 "범종을 치는 도구를 일반적으로 칠격(擊)자를 써서 '격목(擊木)', 또는 고래 경(鯨)자를 써 '경목(鯨木)'이라고도 하는데 경목이라고 할 때는 포뢰와 고래의 연관성에서 유래하는 이름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덧붙였다. 지옥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고 만인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이 범종의 실체이고 이런 점에 보면 고대 신라인들의 정신세계 깊숙한 곳에 고래가 자리잡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 아니다.
신라인들과 고래의 밀접성은 경주 황남동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30호분에서 발견된 토우장식 장경호(국보 제195호)에도 거북이, 새, 개구리,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모습과 함께 길게 누운 고래 형상 토우가 보이는 등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이 고래에게서 배운 지식을 응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 역시 우리나라에만 있는 풍습이다.
한국계 귀신고래를 공식적으로 처음 연구한 학자는 미국인 앤드류스(Andrews R. Champman) 씨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12년 울산을 다녀간 뒤 발표한 논문에는 '한국 귀신고래의 위 속에는 미역이 젤라틴으로 가득 녹아 있었다.'는 부분이 나온다. 크릴새우를 주된 먹이로 하는 다른 고래들의 식습관과는 크게 다른 부분으로 이 문구는 지금도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고래의 식성을 한국 사람들은 그대로 보고 따라하고 있다. 아기를 낳은 산모(産母)가 미역국을 먹는 것이 이런 한국 고래의 식성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다.
중국 당 나라 유서 초학기(初學記)에는 '고래가 새끼를 낳으면 미역을 뜯어먹어 상처를 낫게하는 것을 보고 고려인들이 산모에게 미역국을 먹인다.'고 적혀 있고, 비슷한 이야기가 조선 헌종 때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들어 있다. 미역이 산후조리에 좋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만큼 우리 선조들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고래에게서 생활지혜를 배워 활용했다는 주장도 펼수 있음직 하다.
또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玆山魚譜)에는 '좌초한 고래의 살을 삶아 10여 독의 기름을 얻고 눈으로는 잔(杯)을 만들고, 수염으로 자(尺)를 만들었으며 척추 한절을 잘라 절구를 만들수 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고래는 버릴게 하나도 없다.'는 말은 그대로 적용된다.
다만 상업포경이 금지된 1980년대 중반 이후 국내에서 고래는 거의 100% 식용으로만 쓰인다. 고래전문 식당은 구룡포에 5, 6곳, 죽도시장을 비롯한 포항시내에 10 곳 남짓이 영업중이고 울산 장생포에는 20여 곳이 성업중이다. 특히 울산에서는 매년 5월말∼6월초 장생포 일원에서 고래축제를 여는데(올해 6월8∼11일), 이 일대 상인들이 축제기간에 판매할 고래고기를 사재기하면서 포항 등 다른 지역에서는 고래가 많이 잡히면서도 고기는 평소보다 더 귀한 현상도 빚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단체 녹색연합은 지난 23일 카리브해의 작은 섬 세인트키츠와 네비스에서 전세계 60여 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개막된 국제포경위원회 총회에서 상업포경 허용과 관련한 논의가 예상됨에 따라 우리나라 대표단에게 기존의 상업포경 허용입장을 철회하고 포경반대 선언을 할 것을 촉구했다.
반면 고래 상인들과 어민들은 "바다에 나가면 늘린게 고래이고, 고래떼로 인한 어구손상 등 피해도 적지않다."며 "일정한 한계를 정해 상업포경을 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입장도 많아 포경허용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올해를 기점으로 한층 가열될 전망이다.
포항·박정출기자 jc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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