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광장] 철학 없는 트라이앵글

몇 년 전 스승의 날 즈음에 나의 은사이던 노신부님을 모시고 저녁식사를 했다. 이런 저런 옛 이야기에, 그러니까 신부님이 살아온 일제시대의 만주 이야기부터, 육이오동란, 독재시대의 경제개발을 거쳐 민주화를 위한 데모시대 이야기까지 듣다보니, 훌쩍 밤이 깊었다. 식당을 나서니, 어디서 나왔는지 여고생들이 와르르 몰려나왔다. 헤치고 나가기도 어려웠지만, 노신부님은 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푸념처럼 외쳤다. "누가 대한민국의 꽃다운 처녀들을 한밤중에 거리로 내모는가?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

나쁜 놈들! 그 말이 망치처럼 귓전을 때려 나는 그냥 꾸중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 나쁜 놈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며칠 전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는 동영상을 보니, 거기서도 비슷한 외침이 귓전을 때렸다. "누가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을 미치게 하는가?" 만약 고교생이 그 동영상을 만들었다면, 어찌하여 온갖 시대를 겪은 팔순 노신부님의 말이나, 이제 한 시대를 막 시작하려는 고등학생의 말이나, 중년의 나에게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가?

트라이앵글은 고등학교에서 요구하는 내신, 학원이 요구하는 수능 그리고 잘난 대학들이 요구하는 대학별고사(논술)의 삼각형을 말한다. 이는 2008년 입시제도의 삼각형이요, 수험생들이 빠져나가야 할 삼각형이요, 각계의 요구가 맞아떨어진, 그야말로 절묘한 삼각형이지만, 그 삼각형 속에는 학생이 존재하지 않는 삼각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 삼각형은 오늘의 병든 한국적 실정이 만든 안성맞춤이지만, 거기에 참된 교육이, 즐거운 학문이, 창조적 학생이, 인간의 행복이, 국가의 미래가 존재한다고 보기는 거의 어렵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라나는 대한의 청소년들이 트라이앵글을 "보았다"는 사실이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노신부님만 본 것이 아니라, 오늘 교육을 받고 있는 당사자들이 "보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삶의 문제란 문제를 보는 데서 이미 반은 해결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죽음의 삼각형을 보면서 동시에 희망을 보았다. 문제의 반이 해결되었다면 나머지 반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팔순 노신부님의 세대가 일제의 압박을, 육이오동란의 비극을, 찢어지는 가난을, 독재의 공포를 극복하고 그나마 여기까지 이룩해 왔다면, 이제 고교생들은 죽음의 삼각형을, 빈부의 격차를, 물질만능주의를, 학문의 영리화를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삶을 성취해야 할 것이다. 어제의 청소년이던 노신부님은 우선 먹고 자고 입고 배우는 것이 지상과제였고, 그들의 다음 세대에게는 똑같은 문제를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그래서 오늘의 청소년들은 노신부님 세대의 덕택으로 그런 생존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청소년들에게는 극복해야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들은 그들 시대의 문제를, 어쩌면 생존이라는 기본적 문제보다 더 고난도의 문제를 안고 있다.

오늘의 청소년이 본 삼각형 속에는 교육은 없고 시험만 있다. 친구는 없고 경쟁자만 있다. 창의는 없고 암기만 있다. 대학은 없고 일류만 있다. 사실 일류도 없고 간판만 있다. 오늘의 청소년이 사회로 나서면, 거기에는 도덕은 없고, 법만 있을 것이다. 이제 곧 법도 없고 돈만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돈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 난관이 닥칠 것이다. 그래서 생존의 절박한 문제를 안고 살아온 노신부님 세대나 인간성의 박탈감을 안고 있는 오늘의 청소년은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것같다.

한 나라의 교육실정은 그 나라의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학교는 미래의 국가요, 국가를 기르는 배양세포이다. 그래서 학교는 국가적 문제의 복제판이다. 학교는 교육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분배하고, 삶의 질을 결정하며, 국민의 의식과 가치관을 심고, 문화를 정화하는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러한 복합기능의 배양세포에 영혼이 없다면, 학교라는 배양세포가 자라서 무엇이 되겠는가? 이제 무엇이 두려운가? 국민의 의식이 살아난다고 물러서야할 독재정권도 없는 민주국가라면, 한국인의 정체성을 말살시키려는 외세도 없는 독립국가라면, 왜 아직도 학교라는 배양세포에 영혼을 불어넣지 않는가? 국가의 영혼은 철학이다. 중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지 않은 한, 죽음의 트라이앵글에 철학이라는 영혼을 불어넣지 않는 한, 우리들의 배양세포는 문제를 비판할 뿐, 극복할 혜안을 갖추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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