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와 최광열은 만나면 아웅다웅 싸우면서도, 안보면 그리운 사이였다. 특히 술집에서 만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언쟁을 일삼았다. 최고가 "나는 독립유공자다"라고 하면, 최광열은 "니가 무슨 독립유공자냐"고 코웃음을 쳤다.
사실 최고는 서울의 경복중학 시절 반일학생 지하단체인 흑백단에 가담했다가 몇 달간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최고는 가끔씩 술자리에서 암담한 현실을 질타하듯 "나는 독립군이다"라고 소리쳤고, 옆에 있던 정석모 시인이 "그라마 나는 연합군이다"라고 응수하기도 했다.
국우동 최진사집의 둘째 아들이었던 최고는 최광열이 교편을 잡고 있던 대구상고에서 영어를 가르친 인연도 있다. 최해운이 발간했던 잡지 '예술집단'에 단편 'ㅅ부인의 엉덩이'가 당선(55년)되면서 등단했는데, 이를 계기로 평론가 최광열을 알게 됐다.
이후 두사람은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지만, 기질은 정반대여서 만나면 싸웠다. 장가도 들지 않고 후줄근한 모습으로 다니는 최고의 모습이 보기 싫었던지 최광열은 "궁상떨며 다니지 말고 차라리 어디가서 죽어 버려라"고 탄식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문우에 대한 안타까운 우정의 표현이었다.
최고는 완벽한 데카당스였다.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있는데로 써버렸다. 교사 생활을 할 때도 집안에 쌀 한 가마니 들여오지 못했다. 반면 최광열은 좀 달랐다. 중국집에서 사들고 온 만두 몇개를 안주 삼아 펴놓고 백록다방 구석자리에서 소주를 마시다가 마담의 눈총을 적잖게 받았다.
둘 다 행색이 초라했지만, 세수도 양치도 않은채 완연한 거지행색으로 다니는 최고에 비하면, 최광열은 비록 셋방살이였지만 은행원인 아내를 거느린 어엿한 가장이었다. 그러나 그도 천성적인 방랑벽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최고를 도광의 시인은 무슨 숙명처럼 보살폈다. 도광의는 마산 시절에도 그랬지만, 대구로 와서도 최고의 술값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가을 어느날 국우동 최고 시인의 큰 기와집을 찾았지요. 낡은 골기와 위에 흐드러지게 핀 들국화가 선연했습니다. 마당에는 백일홍 두 포기가 서있었고..."
도광의는 그 후로 "최고 시인에게 '까닭없이 정(情)이 가더라'"고 했다. 최고는 시내에 나오면 으레 도광의가 교편을 잡고 있던 대건고로 전화를 했다. "내다..."라는 최고의 목소리에 도 시인은 그저 "기다리소"라는 응답이 전부였다. 그날 저녁 술값을 마련해 나가겠다는 이야기였다.
애증의 쌍곡선을 그리던 최고와 최광열은 결국 술과 가난 때문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최광열은 죽기 몇 년 전 '사자는 말이 없다'는 회고기를 통해 "나의 대구 생활은 전쟁의 참혹하고 비통함에 청춘을 불사르고, 문학에 매달려 자아를 송두리째 내던졌다"며 "대구의 술을 철저하게 마시고 몇몇 친구들과 나눈 얘기가 전부"라는 말을 남겼다. 그들의 삶은 결국 황량한 바람에 떠밀려 저만치 멀어져갔다.
조기섭(76) 시인과 권기호(69) 시인은 술자리에 앉았다 하면 싸운다. 그야말로 난형난제(難兄難弟)의 설전이다. 조 시인은 53년 '석탑문학' 동인으로 등단해 71년에야 시집(바람의 연가)을 냈지만, 권 시인은 62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해 조 시인보다 앞선 69년 시집(서쪽의 풍경)을 상재했다.
나이는 조 시인이 위이지만, 가방끈(학위)은 권 시인이 길다. 조 시인은 총장을 지냈지만, 권 시인은 학장을 역임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문협 지부장은 또 권 시인이 앞섰다. 이렇게 두 문인의 나이와 경력이 엇갈리니 자연히 술자리에서 은근한 시비거리가 되는 것이다.
두 문인의 설전에는 상대의 출신고까지 '꺼리'가 된다. 조 시인은 대륜고를 나왔고, 권 시인은 계성고를 나왔는데, "'시장바닥에서 논 사람이' 무슨 문학을 해"라는 공격에, "방천 바람 맞은 머리'로 무슨 시를 쓴다고"라고 맞받아치기도 한다.
이같이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백중지세(伯仲之勢)에 주변 문인들은 그저 즐겁다. 그만한 안주거리가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의 다툼이라는게 오랜 친분과 문학적인 정리를 바탕으로 한 격의없는 소통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인연은 무릇 반세기가 다 되어간다. 조 시인은 "나는 문단에서 '누가 선배고 누가 후배냐'를 따지는 경직된 분위기가 싫었다"며 "마음 맞는 문우들과 그저 동고동락했을 뿐"이라고 했다.
무형식의 형식을 추구하는 수필 세계를 떠올리는 말이다. 서로 상대방을 조박(조기섭 박사의 줄임말)과 꼬끼오(권기호의 빠른 소리)로 부르는 두 사람은 60년대 초 단골 술집에서 처음 만났다.
권 시인의 은사인 김춘수 시인이 문협 지부장을 할 때 조기섭 시인이 사무국장을 했던 인연도 작용을 했다. 권 시인은 최근 몇몇 문인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조박이 나를 동생처럼 잘 봐줘서 그랬다"며 오랜 세월 곰삭은 우정을 재확인했다.
권기호 시인은 그러나 김원중 시인과는 소원한 관계였다. 두 사람의 거리감은 60년대 초 청마 유치환에 이어 문협 지부장으로 나섰던 박양균 시인에 대한 지지와 반대 입장에서부터 비롯됐다.
그러다 78년 2월 이우출 시인과 김원중 시인의 문협 지부장 선거가 굴곡을 겪으면서 두 사람은 어쩔수 없는 갈등을 빚게 되었다. 당시 전상렬·최고·조기섭·권기호 등의 지지를 받던 이우출 시인이 문협 지부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신입회원 처리 문제를 이유로 김원중 시인 측이 이의를 제기하자 한국문협이 당선 인준을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그때 김원중 시인을 지지했던 문인들은 박곤걸·예종숙·전대웅 등 주로 박양균 시인과 가까웠던 사람들이었는데, 마침 박양균 시인이 한국문협 부이사장이었던 처지라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결국 신동집·김춘수·이성수 등이 참가한 수습위원회가 구성됐고 그해 현충일 동원예식장에서 재선거를 통해 김원중 시인이 지부장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우출 시인 측의 문인들은 불참으로 항변했다. 대구에 문인이래야 60~70명에 불과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권 시인과 김 시인은 한때 문학성과 인간성까지 들먹이며 상대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으나, 세월따라 불미스럽던 감정들도 대부분 사위어갔다. 이제는 그들도 어느덧 고희(古稀)의 문단 원로가 된 것이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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