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팀의 선전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서글픈 심정도 감출 길이 없네요."
55년 전인 1951년 6월, '6·25참전 소년지원병 전우회' 윤한수(71) 사무총장은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인근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고 있었다. 겨우 16살.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선을 지켰던 그는 아직도 자신을 붙들고 한없이 울며 입대를 만류하던 젊은 어머니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기억했다.
"요즘 같으면 온 몸에 태극기를 휘감고 '대~한민국'을 외쳤을 중학생이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전장으로 내몰렸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그날의 희생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많지 않습니다."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당시 15살의 계성중학교 학생이었던 윤 옹은 징병관이 '너무 어리다.'며 귀가를 권유했지만 학교장 추천서까지 받아가며 입대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다부동 전투를 시작으로 서부전선을 타고 서울과 평양을 거쳐 평안북도 박천까지 들어갔던 그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장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1951년 3·1절 행사 직후 책가방을 교실에 던져놓은 채 자원입대했다는 채중섭(71) 옹. 전북 군산이 고향인 그는 나이까지 2살이나 속여 가며 자원 입대했다.
그 해 10월, =백마고지 전투에 통신병으로 첫 투입된 그는 배가 터지고 다리가 없어진 부상자들의 비명 소리에 몸을 떨기도 했다. 열흘 밤낮동안 이어진 전투의 아군 사망자만 3천534명. 그는 "전쟁이 뭔지도 모르고 지원했다 전쟁의 참혹함을 톡톡이 실감했다."고 회상했다.
최태도(70) 옹은 1950년 8월에 입대, 통신병으로 4년간 근무했다.
이들은 모두 병역의무가 없는 18세 미만의 미성년자들로 2~3개월 군번없이 전투에 종사하다가 정규군에 편입된 '소년지원병' 출신이다. 대부분 전쟁 발발 직후 5~6개월 간 입대했으며 당시 약 2만 5천 명이 참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가운데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생존자는 1만 2천225명(2004년 말 현재). 전사자는 2천464명(6·25참전소년지원병전우회 추산)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도 국가유공자로 예우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6월을 삼켜버린 월드컵 열기가 달갑지만은 않다고 답답해 했다.
최 옹은 "현충일에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태극기가 월드컵 기간에는 어디서 그렇게 많이 쏟아져 나오는 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6월만큼은 호국 선열들을 기억해야 되지 않느냐"는 그는 "공휴일이 되면 내 차에 태극기를 달고 별다른 볼 일이 없어도 시내를 돈다."고 말했다.
윤 옹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고등어를 사라는 안내방송은 해도 현충일이니 태극기를 달라고 방송은 안하더라."며 "월드컵과 같은 중요한 이슈가 있을 때만 애국심이 들끓지 말고 축구에 쏟아붓는 열정의 일부나마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억하는 데 써 달라."고 말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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