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이다. 나는 모 TV 방송에서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의 일부 내용에 대해 강도높게 비판했다. 드라마속 일본장수들을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묘사하다고 있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특히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경우 대다수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일본인들의 우상임에도 불구하고 버럭버럭 소리만 지르는 극악무도한 사이코쯤으로 그린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날 오후부터 터졌다. 연구실로, 이메일로, 해당 방송사 홈페이지로 나를 비난하는 전화, 메일, 댓글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친일파라는 점잖은 표현부터,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방송사 홈페이지를 도배질했고 나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사태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극단적인 이들의 공격에 나는 망연자실했고 방송사는 해명성 팝업까지 띄우는 등 사태수습에 나섰다.
그 일을 겪은 그해 겨울, 우리 가족은 일주일간 일본을 돌아 다녔다. 일본얘기만 나오면 미워하다 못해, 증오하는 아이들에게 일본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이른바 교육여행이었다. 믿던 곱던, 싫던 좋던, 일본은 우리 이웃이니 아이들에게 시각을 좀더 넓혀주자는 목적이었다. 사실 아이들은 평소 내가 이런 요지로 말하면 학교 선생님들도 모두 일본을 싫어하는데 아버지만 괜히 일본편든다고 버릇처럼 입을 삐쭉거렸다.
일주일간의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나는 아이들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행내내 아이들은 자기네들이 유년시절을 보낸 미국못지 않게 일본이 역시 선진국답다며 그들의 친절에 놀라곤 하던터라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대하던 정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첫마디는 "일본이 지구상에 없으면 좋겠다. 너무 깨끗하고 친절하고, 잘 살고 있어 얄미워 죽겠다"는 것이 요지였다. 맙소사, 나의 목적성 일본 여행은 완벽한 실패로 끝났다.
월드컵이 열리고 있다. 대표팀의 성적과 함께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이 일본의 경기다. 그래서 일본과 호주와의 경기에서 방송진행자도 해설자도 호주가 일본을 꺾기를 바래는 바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노련한 비즈니스맨인 히딩크는 한국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을 위해서 일본을 꼭 이기겠다"는 민족감정에 불을 지르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고, 언론은 이를 자극적으로 크게 보도했다.
일본을 이해하자고 하면 모두들 종전후 나타난 독일과 일본과의 다른 행태를 두고 공격한다. 독일은 눈물과 함께 깨끗히 사과한데 비해 일본은 " 35년간 일본지배가 한국 근대화에 도움이 됐다" " 2차대전은 아시아를 위한 해방전쟁이었다" 등등이 일본을 증오하는 이들의 주장이다. 얼핏 맞는 말 같지만 좀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2차대전이 끝난후 독일에서는 나치의 저항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당연히 자신들의 정당성과 나치의 부당성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폴란드 등 이웃 국가들에게 앞장서 사과하고 교과서에 나치만행을 적나라하게 수록했다.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일본은 점령국인 미국의 도움으로 전쟁에 앞장섰던 군국주의자들이 패전에도 불구하고 다시 정권을 잡았다. 이들에게 식민지 지배를 사과하고 그 과오를 교과서에 싣는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른바 "통석의 념"이라는 등 입으로 하는 사과는 혼네(本音, 본심)가 아니다. 그런 사과는 설령 백번 받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독일은 화끈하게 사과하고 반성하니까 좋은 나라, 일본은 발뺌하고 왜곡하니까 나쁜 나라라는 식의 이분적인 사고는 이제 그만 둘 때가 됐다. 냉정하게 보자면 일본은 우리에게 경계의 대상인 동시에 공동번영을 위해 협력하지 않으면 안될 존재다. 과거의 치욕을 잊고 현실적인 이해관계만을 중시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여전히 미움으로만 대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일본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지만 극단적인 증오가 파괴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고, 과거를 부인하는 것은 그들의 불행이다. 어차피 그들이 우리의 분노를 풀어줄 수 없을진대, 우리가 일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행복해진다. 우리들의 월드컵은 끝났다.
김동률 KDI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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