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빠르게 변하면서 우리로부터 멀어지거나 잊혀진 것들이 많다. 토종(土種·그 땅에서 나는 종자) 돼지도 그 가운데 하나다. 어렸을 적 집에서 보았던 돼지는 하얀 색이 아니었다. 까만 돼지였다. 돼지를 하루라도 더 빨리 키워, 돈을 더 벌려는 사람들의 욕심 탓에 토종 돼지는 외국에서 들어온 외래 돼지에 밀려 어느새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김천을 벗어나 거창으로 향하는 3번 국도. 적당히 굴곡진 도로를 따라 지례면으로 달린다. 아련한 기억 속에나 남아 있는 토종 돼지를 만나러 가는 길. 혁신도시 등 개발의 광풍에서 비켜난 지례는 아직도 시골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지례는 옛날부터 토종 돼지(흑돼지, 토돼지, 검은 돼지)로 이름난 곳. 강원도 명파 돼지, 전북 장수 돼지, 합천 돼지, 강화도 돼지, 제주 똥돼지와 함께 지례 흑돼지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조선농업편람'에 따르면 "토종 돼지는 머리가 길고 털은 검은 색에 짧고 윤이 나며 덩치는 왜소하고 고기맛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적합하며 체질도 강건하다."고 했다.
승용차로 30분 가량 달려 도착한 지례면 교리. 미소 짓는 흑돼지 캐릭터가 먼저 손님을 반갑게 맞는다. 올해가 황금돼지해여서인지 웃는 돼지의 모습이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현재 지례에서 흑돼지를 키우는 농가는 7가구로 사육두수는 3천여 마리에 이르고 있다. 한때는 잘 자라는 서양 돼지를 선호했으나 최근 들어서는 토종 흑돼지의 맛이 알려지면서 사육 농가가 점차 느는 추세다.
농가에서 키운 흑돼지를 판매하는 전문 식당은 18곳. 면 소재지인 교리에는 반경 수백m에 식당 16곳이 있고 조금 떨어진 신평1리, 도곡2리에도 식당이 자리잡고 있다.
면사무소 인근에 있는 '흑돼지농장가든'. 주인 임순태(48) 씨는 흑돼지 800여 마리를 직접 키우면서 식당도 같이 하고 있다. 15년전부터 흑돼지와 인연을 맺은 그는 돼지띠다. "흑돼지는 강인한 성격에 병에도 강해 우리 민족과 많이 닮았어요. 마침 올해가 돼지해인 만큼 지례 흑돼지가 전국에 많이 알려지고, 판로도 늘어나길 바랍니다."
우선 왕소금구이(1인분 250g에 6천 원)를 주문했다. 고기의 양이 대도시 식당들보다 푸짐하고, 한눈에도 유달리 붉은 색깔과 마블링 등 육질이 좋아 보인다. 숯불에 잘 구운 고기의 맛은 담백하고 고소하고 쫄깃하다. 다소 질기다는 손님들도 있다지만 "고기가 차지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돼지고기와 달리 흑돼지는 껍질과 비계를 그대로 구워도 기름이 흘러내리지 않을 정도다. 살코기보다 비계가 더 쫄깃하다는 손님들이 많다.
지례 흑돼지는 왜 맛이 있을까? 임 씨는 물과 공기에서 그 비결을 찾는다. "전통 똥돼지에 제일 가까운 지례 흑돼지는 철분이 많이 함유된 지하수를 먹고, 공기가 좋은 곳에서 자라 고기 맛이 특별하지요. 지례 흑돼지를 같은 사료를 주고, 다른 곳에서 키울 경우에는 고기 맛이 훨씬 떨어집니다."
문득 귤화위지(橘化爲枳:기후와 풍토가 다르면 강남에 심은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라는 고사가 떠오른다.
왕소금구이에 이어 나온 양념구이(250g에 6천 원)는 흑돼지 특유의 쫄깃한 맛에, 진한 양념이 잘 어우러져 색다르게 다가온다. 지례에서는 비계를 하얀 고기라 할 정도로 돼지 비계의 맛을 즐기는 사람이 많고, 여성들도 거부감 없이 좋아한단다.
지례 흑돼지 식당들은 솔잎가루를 사료로 한 돼지를 내놓거나 연탄 화덕을 사용해 고기를 굽는 등 집집마다 나름의 특색이 있다. 메뉴도 왕소금구이, 양념구이, 삼겹살, 돼지갈비 등 다양하다. 두 명이 갈 경우 대도시처럼 3, 4인분을 시키지 말고 2인분을 시켜 먹은 후 나중에 추가로 주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훈훈한 지례 인심 만큼이나 고기 양이 푸짐하기 때문이다.
글·이대현기자 sky@imaeil.com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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