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의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일까? 대부분 가정폭력은 때리는 남편과 맞는 아내를 떠올리게 한다. 남편에게 맞아서 온몸이 멍투성이로 변한 아내들의 사진을 종종 접하게 된다. 때문에 가정폭력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관련 법도 시행됐고, 다양한 기관들이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상담도 하고 있다. 하지만 때리는 것만이 폭력은 아니다. 때리는 아빠와 맞는 엄마 사이에서 숨죽여 흐느끼는 아이들, 고함지르는 부모 사이에서 주눅든 아이들, 냉랭한 부모 틈바구니에서 눈치만 슬슬 보는 아이들. 이들 모두가 가정폭력의 피해자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이런 상황을 피해로 보지 않고 있다. 이들에 대한 도움의 손길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 사람들이 두려운 은주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송은주(가명)양. 대구 모기관에서 상담치료를 받고 있다. 평소에 말이 거의 없고,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한다. 상담자는 "폭력적인 분위기에 억눌린 상태가 지속된 탓에 감정 드러내기를 두려워한다."며 "항상 위축돼 있고 불안해하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기본적인 신뢰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은주의 가정 분위기. 아빠는 충동적이고 억압적이면서 다분히 자기주도적인 사람이었다. 엄마는 이런 아빠의 눈치를 보면서 행여 고함이라도 칠까봐 불안해하며 맞춰주고 있다. 언제 밥상이 엎어질 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이 항상 흐른다. 은주는 떼를 쓴다거나 고집을 피우는 일은 꿈도 못꾼다.
자기를 조금이라도 드러낼 경우, 아빠에게 혼나기 때문에 그저 묻혀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은주가 그리는 그림에서 자신은 항상 빠져있다. 주변상황만 그리거나 특징적인 주변인만 등장한다. "너는 어디에 있니?"라는 물음에 은주는 말없이 그림 바깥쪽을 가리킨다. 워낙 소심한 성격의 딸이 걱정스러워 엄마가 데려온 경우. 하지만 치료는 더디다. 가정 분위기가 바뀌지 않기 때문에 효과도 의문스럽다.
◇ 학교만 가면 말을 잊는 승호
중학교 1학년인 최승호(가명)군. 전문직에 종사하는 승호의 부모님은 얼마 전까지도 전혀 아들의 문제를 눈치채지 못했다. 집에서는 항상 떠들고 웃고 활달한 성격인 아들에게 부모는 원하는 것을 다 주었다. 아침마다 고급 승용차에 태워 등교시켜주고, 집에 오면 하고픈 대로 하도록 간섭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학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담임 교사는 승호가 학교에서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고 걱정했다. 당연히 어울리는 친구도 없다.
미술치료를 받게 된 승호는 12가지 그림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는 물음에 생쥐와 칼을 택했다. 가장 왜소한 생쥐와 가장 폭력적인 칼을 택한 것이다. 이유는 부모였다. 자존심이 강한 부부는 서로 대화를 잊고 살았다. 가정이라는 테두리에 묶여있을 뿐 살가운 애정표현은 전혀 없었다.
그런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승호는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억지로 부모가 있는 곳에서만 활달할 척, 기분 좋은 척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차갑디 차가운 집안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렇게 애를 쓰고 나면 아이는 정신적으로 탈진해버렸다. 학교에 가면 매사가 귀찮아 말 한마디 떼기도 싫어졌다.
◇ 먹는 것에만 집착하는 우준.
초등학교 3학년인 강우준(가명)군은 학교에서 '돼지'라고 놀림받는다. 우준이는 비만이라는 것을 알지만 먹을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다. 먹지 않을 때엔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림을 그려도 항상 먹는 자와 먹히는 자가 등장했다. 거대한 부리를 가진 새가 갯벌 구멍에 박혀있는 갯지렁이나 조개를 집어삼키는 그림도 그렸다. 부모님은 다툼이 잦은 편이다. 한창 다투다보면 처음 이유는 온데간데 없고 우준이가 싸움 한가운데 놓여졌다. "애를 왜 이렇게 키우냐?"는 아빠의 질책에 엄마는 "아빠가 무관심하니까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맞받아쳤다.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혼자 생각해보지만 항상 아빠와 엄마가 다투고나면 모든 잘못은 자기 탓이라는 답답한 마음이 밀려왔다. 그럴 때면 먹을 것을 잔뜩 안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게임 속에서는 자신을 나무라는 사람도 없고, 아이템을 많이 모으면 마음대로 힘을 휘두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우준이는 자기만의 껍질 속으로 빠져들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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