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카지노에서 '사임'을

게임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다. 특히 카드로 하는 게임은 재미를 넘기 일쑤여서 탈이다. 놀음에서 시작했거나 아예 노름으로 시작했거나 결국 노름으로 끝나기는 마찬가지여서 그렇다. 물론 심한 중독증세를 드러내면서.

우리 사회에서 한 해에 사용되는 카드는 얼마나 될까. 트럭으로 셈하면 북한에 보내는 식량보다 그 양이 적을까 많을까. 이건 통계청의 몫이다. 문제는 그 카드 뒤편에 깔린 보이지 않는 음흉한 온갖 수법들이 오직 한 장의 히든카드를 위해 목숨 바치는 현실. 지금 그게 답답하다. 그 답답함을 푸는 일은 통계청이 아니라 국민들의 몫이기에 가슴이 막힌다. 이 기막힌 현실.

게임에 너무 몰두해 왔었다. 늘 그런 게임 판이 벌어지는 한가운데 있다는 게 탈이다. 게임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길까. 넘치는 승부욕. 뒤집고 쪼개고 후비고 비틀고. 그 결과물을 날름 받아 또 훌륭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내는 386. 그 시나리오가 꼼수라며 손사래를 치기도 한다. 그렇지만 손사래 치는 그 속내도 냉철하게 들여다보면 한통속일 경우도 허다하다. 혹 알 수 없는 또 다른 그 무엇이 늘 비장이라는 그 카드 바로 뒷장에 끼여 있을까. 긴가민가 은근히 기대하는 한통속들. 그 아래 게정 부리며 질펀하게 진치며 대박을 기다리는 수두룩한 아전들. 그래서 시나리오는 만들어지고 카지노의 밤은 흥청거린다. 영화 '타짜'만큼 흥미진진 할 리는 없지만 '몫'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지지율 10% 안팎이면 카드를 쥘 자격이 있기나 할까. 게임은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지지율이 곧 승률일 수는 없지만 1%의 승률로도 카드를 쥘 수 있다는 게 게임의 또 다른 매력이다. 0.1%인들 어떠랴. 지지율 1%인들 어떠랴. 카드를 쥔다는 데야 할 말이 없다. 이유는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환상적인 변수 때문이다. 누가 이 시점에서 감히 그 변수를 말할 수 있는가. 지난 대선 때 충분히 경험했질 않는가. 그런 걸 변수라고 한다며 부리는 고집. 그런 것은 고집이 아니라 아집이라고 일러주면 또 고쳐 고집이라고 아집할 게 뻔하다. 아집이든 고집이든 지금 그런 것이 설득력 있는 일인가.

도박게임의 승부사 데이비드에게 마침내 임종이 다가왔다. 주치의는 조용히 데이비드에게 다가가 "선생님 내일 아침 8시를 넘기기 힘드실 것입니다. 각오를 단단히 하셔야죠." 그러자 데이비드는 다소 맥 풀린 목소리로 "의사 선생님 내기할까요? 내일 아침 9시까지 제가 살면 1파운드를 내셔야 합니다." 마치 특별담화 같은 데이비드의 목소리에 승부사다운 면모만을 읽는다면 50점. 특별담화를 듣고 있는 듯한 주치의의 표정도 함께 읽어야 만점이다. 지금 우리는 모두 데이비드의 주치의가 된 느낌일까.

개헌 논의는 엊그제 일이 아니다. 지난해 초에도 나왔다. 그때는 헌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문화라며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대연정'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몇 달 동안 세상은 마치 카지노 분위기였다. 계속 이어지는 히든카드들. 별수 없었질 않은가. 끝내 으름장 히든카드 하나 있을까 말까. 그게 하야 카드라면 분명 시큰둥한 반응뿐일 게다. 그게 미리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권한과 의무'를 내걸며 개헌 발의를 했다. 마치 전에는 남들이 칼이 되고 내가 생선이었지만 지금은 그대들이 생선이고 내가 칼이란 심정으로 지금이라도 차라리 침묵이면 좋다. 탈무드에 나오는 현인이 되는 일곱 가지 조건 중에 첫 번째가 자기보다 현명한 사람이 있으면 침묵한다라는 글귀다. 일곱 가지 조건 중 이 한 글귀만 지켜도 현인이 되는 확률은 지지율 10% 선보다 높은 14% 이상이질 않은가. 계산법이 좀 소란스러운가. 명나라 주국정이 지은 '自述(자술)'에 이런 말이 있다. "천하에는 본시 일이 없건만 똑똑한 그대 제 스스로 소란스럽네(天下本無事 庸人自擾之)."

침묵하면서 좀 느리게 살면 어떨까. 지나치게 스피디한 요즘 느리게 살기 예찬이 유행이다. 느리게 살기로 인기를 모은 한 작가는 느리게 살기의 미학을 강연하러 불려 다니기에 바빠 죽겠다는 아이러니. 비록 카지노 판일지언정 이런 애교 부럽지 않은가. 카지노 판에도 인내와 격정 두 단어가 복과 화의 비상구다. 이 점을 명심한다면 구태여 카지노에서 사임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김채한 논설위원 namu@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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