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레일을 따라 걸어본 적이 있는가.
여름날 저멀리 아지랑이 피어나는 레일을 보면서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고 겨울날 레일의 차가운 느낌에 살짝 몸서리를 쳐봤는지... 옆에선 철길을 걸으면 벌금을 문다고 모처럼의 감흥에 재를 뿌리지만 마냥 그 길을 따라 영원히 걷고 싶은 이 마음은 대체 뭘 하고픈 걸까.
터널은 또 어떤가. 깊고 어두운 심연에 몸을 내던지면 어떨까. 기차 안에서 터널을 만나면 그냥 어둠속에 묻힐 뿐이지만 터널 앞에 서면 그 벌린 아가리에 몸과 마음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그 속에 들어가고 싶지만 웬지 모를 두려움에 쭈뻣거리는 내 자신을 보게 된다.
▲폐터널은?=터널은 산 아래를 뚫어 만든 지름길이다. 기차가 산 허리를 둘러가면 훨씬더 좋을 듯 하지만 빠름을 추구하는 교통의 속성상 터널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힘들게 뚫어놓았지만 철길이 바뀌면 터널은 용도폐기된다. 전국 곳곳에 버려진 폐터널이 많다.
한국철도시설공단에 따르면 철도의 복선화·이설 등으로 사용하지 않는 터널이 40여개나 된다고 한다. 영남지역에만 20개 가까이 있다. 상당수는 입구를 막아놓아 방치돼 있지만 도로나 공장, 창고 등으로 이용되는 곳도 꽤 있다. 대개 레일은 없어지고 예전 기차가 지나다닌 흔적만 남아 있다.
유일하게 레일이 남아있는 곳은 경북 문경시 마성면 고모산성 아래의 폐터널이다. 석현터널은 일제시대 문경에서 나오는 석탄을 실어내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지난 2000년 문경선 전체가 없어지면서 용도폐기됐다. 겨울철에는 뻥 뚫려있는 폐터널이 얼씨년스럽게 보이지만 봄이 되면 레일바이크(자전거)를 타려오는 관광객이 꽤 많다.
아마 가장 유명한(?) 폐터널은 경남 진주시 정촌면 화개리의 죽봉터널일 것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 송광호가 범인으로 의심되는 박세일을 위협하는 장면이 나오는 곳이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한 탓에 기억에 남아있을 뿐이나 여느 폐터널과 별 다를바 없다. 그저 나지막한 구릉속에 자리잡은 평범한 터널이다. 바로 앞의 죽봉마을은 전형적인 농촌이어서 볼만한 것이 그리 없다. 폐터널의 길이는 486m, 높이는 6m. 1965년 개통돼 진주~사천간을 운행했지만 1980년 철도 자체가 없어졌다.
▲영화 촬영지로 각광=경남 밀양에 가면 훌륭한 드라이브 코스가 있다. 시 중심가에 가까운 영남루에서 동창천을 따라 청도 방면으로 가는 길이다. 산 허리를 따라가면서 오른쪽에 뱀처럼 굽어흐르는 내성천의 경치가 볼만 하다. 철로가 지나던 자리는 좁다란 차도로 변했지만 터널은 그대로 남아있다. 주민들은 백송터널이라고 하는데 공식 명칭은 용평터널이다. 1905년 경부선 철로로 출발했지만 1940년 산 밑으로 터널이 새로 뚫리면서 용평터널의 가치도 끝난 듯 했다. 그러나 그후 인도로 이용됐다가 이제는 비록 차 한대 겨우 다닐 정도의 좁은 도로지만 훌륭한 관광코스가 됐다.
터널 길이는 300m로 꽤 길다. 만든지 100년도 넘었지만 어디 한군데 빈 틈이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 터널 안으로 들어서면 발소리가 빈 공간을 그윽하게 메우고 전구 불빛이 몽환적이다. 이곳에서도 정우성 주연의 영화 '똥개'가 촬영됐다. 똥개 친구들과 동네 불량배간 패싸움 장면이 나오는 곳이다.
▲저장고, 창고로 활용?=폐터널은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임대를 해주고 있지만 실제 활용되는 경우는 몇군데에 불과하다.
청도군 화양읍 남성현 마을에서 산쪽으로 1km정도 올라가면 폐터널이 있다. 폐터널이 포도주 저장고 겸 레스토랑으로 활용되는 곳이다. 명칭은 성현터널인데 길이는 1천500m다. 1930년대 인근의 경부선이 마을 아래로 이설되면서 폐터널이 됐다. 터널입구에는 '대천성공(代天成功)'이라는 의미를 알수 없는 왜식 팻말(일본 천황의 무운장구를 비는 듯한 의미로 추측됨)이 눈길을 끈다.
와인터널의 안완수(33)씨는 "터널 내부는 년중 섭씨 12, 13도를 유지하고 있어 감 포도주를 저장하기에 좋은 환경"이라면서 "터널이 갖고 있는 낭만과 기능을 잘 활용했기 때문인지 손님들의 반응이 좋다"고 했다.
충주시 일대 인등산 자락에는 1980년 충북선 복선화 사업으로 노선이 바뀌면서 폐터널이 여럿 생겼다. 버섯을 재배하는 곳도 한때 있었지만 요즘은 없어졌다.
동량면 조동리 대모천 마을에는 폐터널을 이용한 김치 저장고가 있다. 폐터널의 항온 기능을 활용해 '묵은 김치'를 대거 저장하고 있었다.
산앤들 유통 대표 이하늘(44)씨는 "올 4, 5월 되면 본격적으로 김치를 시장에 내놓는데 냉장고에 보관하는 김치와는 차원이 다를 것"이라면서 "그것은 자연적인 맛과 인공적인 맛의 차이"라고 했다.
경주시 석장동 부엉마을 앞에 가면 두개의 터널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한곳에는 기차가 다니고 있고 다른 한곳은 폐터널이다. 일제시대에 놓여졌다가 1993년 경주 외곽철도가 개설되면서 폐터널이 됐다. 이곳은 개인 소유지인데 창고로 쓰이고 있다.
오영학(57)씨는 "얼마전 폐터널에 대해 안전점검을 했는데 100년 가까이 됐지만 아주 튼튼하다고 했다"면서 "일제시대에도 얼마나 꼼꼼하고 정밀하게 터널을 만들었는지 알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당시 일본 기술자들은 시멘트와 섞는 모래와 자갈을 깨끗하게 씻어 콘크리트를 만들어 강도를 유지했다고 한다. 물론 모래와 자갈을 시냇물에서 일일이 씻고 고르는 일은 한국인 노역자들이 맡았겠지만...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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