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저속과 과속의 부조화, 페미니즘

저속과 과속의 부조화, 페미니즘/사빈 보지오 발리시 외 지음/유재명 옮김/부키

'여자라서 행복해요.'

넓고 깨끗한 집에서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가전제품에 기대 미소짓는 CF는 각종 가전제품 및 아파트 광고에서 재생산되고 있다. 그런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어? 내가 정말 여자라서 행복한가?'라는 착각이 들 정도.

그렇다면 숱한 가전제품의 등장이 여성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냉장고, 청소기, 세탁기 등 가전제품이 처음 등장했던 1920년대.

미국의 가정과학운동의 일환으로 일상에 등장했던 가전제품은 그 탄생 배경부터가 수상쩍다. 바로 2차 대전 후 여성들을 노동시장에서 몰아내고자 미국이 선전운동을 벌이고 있을 당시였다. 미국은 여성들이 있어야 할 곳은 가정, 즉 새로운 가정용 기구들에 둘러싸여 왕비가 된 것 처럼 살 수 있는 가정이라는 것을 미국 여성에게 설득하기에 전념했고 이 가정용 기구들이 여성들의 삶을 편리하게 해 줄 것임을 장담했다. 이렇게 해서 여성들은 일자리를 떠나 가정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선전처럼 가전제품이 여성 삶을 여유롭게 만들어줬을까? 결과는 그 반대였다. 단순한 가사노동에 드는 시간은 줄인 반면 결과적으로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 위생 및 가정관리의 모델이 생겨난 것. 가정은 반짝반짝 윤이 나야하며 정돈이 잘 돼 있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소비의 계획, 저축 등 잠시라도 가사 노동에서 해방될 틈이 없을 정도로 더 다양한 일이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가정주부'란 말은 2차 산업혁명이 낳은 어휘다. 산업화와 더불어 농업과 가내고용은 줄어든 반면 삶의 기준이 일터가 되어 가사노동을 전담할 사람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여성노동자들은 가정으로 돌아가야 했으며 '가정주부'로 불리기 시작한 것.

이 책은 '보이지 않는 인간' 여성이 어떻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됐는지 20세기에 벌어진 주요 사건과 여성사에 획을 긋는 중요 인물들을 통해 제시한다.

이 중에는 '낙태 투쟁'도 포함된다. 낙태는 여성해방운동에 대중적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운동을 결집시키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매년 치욕과 고통속에서 수많은 불법 낙태가 이루어져 엄청난 수의 여성들이 죽음에 이르렀다. 1973년 초 프랑스의 불법낙태 건수는 매년 40만~100만건, 이탈리아 불법낙태는 매년 100만~250만건에 이르는 것으로 보았다. 그 중에서 2만건은 사망에 까지 이른 것. 1970년대 유럽 여성들은 합법적인 임신중절의 권리를 투쟁을 통해 쟁취해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해보이는 사회주의 체제에선 어떤가. 그곳에선 1910년대 이혼의 유죄성이 폐지되고 종교의식에 따른 결혼식은 없어졌으며 남편의 자신의 성(姓), 국적을 강요할 수 없었고 사생아도 적자와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됐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은 남성들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결국 모든 것은 공수표로 돌아가고 1935년 가부장제가 되살아났고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되자 여성들은 거의 모든 것을 다시 쟁취해야만 했다.

이 책은 20세기 여성계의 굵직한 사건 뿐만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 시몬 드 보부아르, 가브리엘 샤넬, 마들렌 펠티에 등 다양한 여성운동가들의 삶과 관련 사건들을 정리해놓았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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