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말과 글이 흐르는 풍경)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서울 출장길이었습니다. 교육부에서의 회의가 예상보다 일찍 끝나 서울역에 되돌아왔을 땐, 예매해둔 열차표의 출발 시각까지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가방을 고쳐 들고, 역 앞 지하도의 철도문고로 가서 새로 나온 책들을 뒤지다가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라는 시집 한 권을 샀습니다.

열차 좌석에 앉아 출발을 기다리며 시의 집 대문을 열자 이상국 시인의, 눈 덮인 진부령을 자박자박 걷는 달빛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시는 재미로 만나거나 즐겨야 좋은데 그것에다 내 존재와 세계를 다 싣고자 하니 서로 힘들다. 그러나 그 일마저 없었더라면 무엇으로 이 썰렁한 세상을 건넜을까 생각하면 시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또 고맙다. 겨울이 설악처럼 깊다.' 그가 들려주는 말들의 무게를 가늠해 보는 동안, 열차는 어느새 서울을 떠나 '설악처럼 깊은' 겨울 산천의 해질녘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입구에는 '살구꽃'이라는 시가 걸려 있었습니다. '살구꽃이 피었습니다/서문리 이장네 마당/짚가리에 기대어 피었습니다/지난 겨울/발 시려운 새들이 찾아와/앉았다 간 자리마다/붉은 꽃이 피었습니다' 혹독한 겨울을 힘겹게 견뎌낸 살구나무 가지, 그 가지에 돋아난 살구꽃은 어쩌면 새들의 눈물이 아닐는지, 새 생명의 자리는 그 어느 것이나 이렇듯 가슴 저린 내력이 서려 있겠지요.

'서문리 이장네 마당'을 나서서 찾아간 시 편 편마다 그 행간에는 맑고, 깊고, 서늘한 강원도 깊은 산골 도랑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산의 주인은 그들이고 우리는 이 산을 잠시 지나가는 또 다른 짐승일 뿐이니, 반달곰이 저항령 가을에 도토리를 줍고 있더라도 그냥 지나가자'고 하는 전언이나, '비가 마당을 깨끗하게 쓸고 간 저녁/누군가 어둠을 바라보며 근대국을 먹는다는 것은/어딘가 깊은 곳을 건너간다는 것이다'라는 도저한 응시,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농사를 생각한다/그는 곡식이든 짐승이든/늘 뭔가 심고 거두며 살았는데/나는 나무 한 그루 없이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시퍼런 성찰 등등….

행간을 헤매는 사이 날은 저물어 '후미진 골짜기에 몸을 숨겼던 밤이 산적처럼 느닷없이 달려들어 멀쩡한 집과 나무와 길을 어둠 속에 쳐박는' 풍경이 차창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어둠을 향하여/나는 칸델라 불빛 같은 생각들을 흔들며' 시인을 따라 양양의 거리를 달리다가, 갑자기 터져 나온 차내 방송에 깜짝 놀라 서둘러 동대구역에 내렸습니다. 아니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내렸습니다. 서늘한 풍경 속의 출장길을 접으며 천천히 택시승강장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언젠가는 이 시인과 만나 소주 한 잔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꼬깃꼬깃 접어 양복 안주머니에 간직하면서.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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