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앵각은 대구시 중구 만경관 주차장 옆에 있는 요정이다. 1958년부터 그 자리에, 그 모양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처음엔 한 채였는데 뒷집을 사들여 두 채로 만든 때가 1961년이었다. 그 시절 정·재계 '어른'들이 춘앵각을 찾아왔고 앞집만으로는 손님을 다 받을 수 없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도 찾아오곤 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의 회장, 사장들 중에도 단골이 많았다. 당시 도지사 정도 되는 손님은 지금은 문간방에서 술을 마셔야 할 정도였다.
춘앵각의 전설 나 사장은 8년 전 은퇴했다. 그는 1세대 손님들(현재 80, 90대)이 떠나고 2세대 손님들(현재 50, 60대)의 술상까지는 앉을 수 있었다. 그러나 3세대 손님들(현재 30대, 40대)과 술상에 함께 하기란 민망했다. 그래서 그는 떠났다. 지금 춘앵각은 김은정 마담이 지키고 있다.
이 바닥 아가씨들의 꿈은 크든 작든 자기 가게를 가지는 것이다. 아가씨로 출발해, 마담이 되고 사장이 되는 것은 '물장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나 사장이 춘앵각을 지키던 시절 많은 아가씨들이 마담이 되고 독립해 주인이 됐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 바닥 경기가 변하면서 아가씨들이 떠나고 요정도 하나 둘 사라졌다. 대구에 남은 전통 요정은 한 손에 꼽을 정도다. 아가씨가 마담이 되고, 마담이 사장이 되는 흐름이 허물어진 데야 경기 탓도 있지만 마담들 개인사정도 한몫을 했다.
아가씨나 마담이 무너지는 것은 외로움 때문이다. 남자를 가리고 조심해야 하는데, 외로움에 사무치다보면 옆에서 챙겨주는 남자에게 끌리게 된다. 그러면 엉망이 돼 버린다. 몸도, 마음도, 돈도 잃는다.
춘앵각 김은정 마담은 각별히 조심한다고 했다.
이 남자는 이래서 안되고, 저 남자는 저래서 안되고…. 안 되는 이유를 자꾸 자꾸 만들어서 자신을 다독인다. "남자는 바람 같은 것이니까."
김 마담은 이른바 '요정 아가씨' 출신은 아니다.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요리점을 열고 싶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공부도 잘했다. 당시 공부 깨나 하는 여학생들이 가는 학교에 진학했다. 그래봤자 남은 것은 별로 없다. 학창시절 범생이 사회생활까지 예쁘게 하는 것은 아니더라. 학교 때 농땡이 치던 사람들이 범생 사회인이 되는 경우도 많더라.
하여간 처음에는 요리점을 운영하고 싶었다. 그래서 음식 맛 깔끔하기로 이름난 춘앵각 주방에 들어왔다. 그때가 1996년이다.
그런데 막말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더라. 당시 주방엔 주방장이 있고, 찬모가 있고, 청소부가 따로 있었다. 김 마담에게 부여된 직책은 주방 찬모 보조였다. 주방장 보조도 아니고, 주방 찬모의 보조.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마늘'파 다듬고, 설거지하고, 청소하는 것이었다. 이미 웬만한 요리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그런 허드렛일이나 하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짜증을 곧잘 부렸다. 그때 나 사장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요리만큼 손님접대도 중요하다. 나한테 배우면 손해는 안 볼 거다."
그래서 생각지도 않았던 마담이 됐다. 그럭저럭 해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가씨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주방출신이라고 무시한 것이다. 지금도 단골 손님 중에는 김 마담 대신 김 주방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옛날부터 들락거린 단골들의 친근한 농담일 뿐이다. 그러나 당시엔 달랐다. 주방출신이라고 무시하는 것도 힘든데, 못 마시는 술을 마시자니 힘에 겨웠다. 술을 거절해서는 안되고, 마시고 취해서도 안되고, 아무리 취해도 손님들 끝까지 챙겨야 하고…. 말솜씨도 없었다. 폭탄주 받고 '폭탄사' 한마디하라고 하면 '감사합니다.'란 말 외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의 폭탄사를 기다리다 지친 손님들이 '그만 넘어갑시다.' 할 땐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하고, 말 한마디 못하는 자신이 안쓰럽기도 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면서 '길이 아닌가 보다.'는 생각이 들어 춘앵각을 떠났다. 마담생활 1년 3일 만이었다.
경기도 일산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나 사장이 직접 찾아왔다. 춘앵각에서 일하던 시절 열심히 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춘앵각에 다시 들어와 앉았다. 생각해보면 다 추억이다.
사람들은 흔히 '마음은 청춘인데 몸이 늙는다.'고 하지만 글쎄다. 전설의 나사장님처럼 30수년간 춘앵각을 꾸려온 것도 아닌데, 몇 해 요정 살림을 책임지다 보니 '몸보다 마음이 먼저 늙는다.
요정 마담생활을 하다보면 일 하는 아가씨들이 딸 같고, 손님들 사위 같을 때가 있다. 50세가 넘은 손님들 중에도 우스개로 '장모님, 장모님'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이고 우리 사위 왔는가.'하고 받는다. 그 농담이 처음엔 그렇게 어색했는데, 요즘은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진짜 장모가 된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을 보면 확실히 몸보다 마음이 먼저 늙은 모양이다. 아침 운동을 가도 또래들보다 나이든 사람들이 훨씬 편하다.
요즘 춘앵각을 찾는 손님들 중에는 옛 향수를 잊지 못해 오시는 분들이 많다. 참 화려한 세월이라고 들었다. 1985년인가 1986년인가, 당시 춘앵각의 나 사장이 새벽에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있었다. 단골이던 의사는 새벽에 병원으로 달려오기도 했다. 나 사장이 보름 동안 입원한 병실은 온갖 계층의 신사들로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병원 과장들도 매일 번갈아 가며 들락거렸고, 춘앵각의 아가씨들은 물론이고 이미 춘행각을 떠나 독립한 아가씨들도 찾아왔다. 병원 환자들은 엄청난 거물이 입원해 있는 모양이라며 기웃거리곤 했단다.
그 시절 춘앵각은 알아주는 요정이었다. 손님들은 각 분야의 수장들이 많았다. 아가씨들도 요즘과는 많이 달랐다. 한두 가지 사연 없는 아가씨가 없었고, 재주 없는 아가씨도 없었다. 당시 춘앵각에서 아가씨를 했다고 하면 대구시내 어느 술집에서나 인정해주었다. 말하자면 춘앵각은 요정 아가씨 사관학교로 통했다. 지금은 전설이 돼버린 나 사장이 그만큼 철저하게 가르친 덕분이다.
그 시절엔 특정 아가씨에게 반해 매일저녁마다 찾아오는 손님이 있었고, 금호호텔(現 아미고 호텔) 스카이 라운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춘앵각 뒷채의 불꺼지기만 기다리는 손님도 있었다. 뒷채의 불꺼지면 영업이 끝나고, 영업이 끝나면 사모하는 아가씨나 마담이 퇴근해 달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김 마담은 옛날 나 사장처럼 춘앵각을 폼 나게 운영하지는 못한다. 당시엔 마담이 여럿이었지만 지금은 김 마담 자신을 비롯해 둘 뿐이다. 예전처럼 주방 찬모 보조를 둘 형편도 아니다. 그저 주방장과 아줌마, 지배인이 있을 뿐이다. 요리를 좋아하는 김 마담 자신이 부엌에 자주 들락거리고 18명이나 되는 아가씨들도 꾸짖는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李대통령, 대북전단 살포 예방·사후처벌 대책 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