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4살 '다 만원권'이 드리는 편지

그간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처음 여러분 곁을 찾아뵌 지도 벌써 24년이나 흘렀습니다. 저의 공식 이름은 '다 만원권'입니다. 앞서 두 분의 형님이 계셨죠. 1973년 지폐 역사상 처음 등장한 '가 만원권'과 저보다 훨씬 덩치가 컸던 '나 만원권'(1979년)입니다. 저 역시 동생이 있습니다만 쌍둥이나 마찬가지죠. 불법 위변조를 막기 위해 제 몸에 일부 첨단기능을 덧붙인 것 외에 크기나 그림은 똑같았으니 말입니다. 열흘 전 저와는 전혀 딴 판인 동생이 새로 생겼습니다. 바로 '바 만원권'이죠. 당분간 저와 제 동생을 함께 볼 수 있겠지만 일년 쯤 지나면 오히려 제 모습을 보기가 더 어려워질 겁니다. 짧지않은 24년을 한 번 돌아볼까요.

제가 세상에 처음 선보인 때는 1983년 10월 8일입니다. 당시 대통령 내외가 서남아 및 대양주 6개국 순방길에 오른 날이기도 했습니다. 일간지 광고면에는 요즘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내용들도 올라왔습니다. 극존칭을 써가며 '대통령 내외분의 성과를 기대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저에 대한 기사는 이틀 전쯤 크기와 도안이 달라진 새 만원권이 나온다는 짤막한 내용 뿐이었습니다. 열흘 전 막내 동생이 등장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답니다. 제 생일 다음날도 신문 지면에서 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구요? 바로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테러가 발생한 날이었거든요. 당시 대통령을 수행 중이던 장관급을 비롯한 수행원 17명이 숨지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테러가 아니었더라도 제 이야기는 별로 쓸 게 없었을 겁니다. 요즘처럼 앞번호 희귀지폐를 구하기 위해 며칠 밤을 새고, 또 몰려든 사람들끼리 한국은행 앞에서 북새통을 벌인 일이 없었으니까요. 세상이 달라졌죠?

물가도 달라졌습니다. 당시 일간지 아파트 분양광고를 보면, 25평 아파트 분양가가 2천 500만~3천만 원이었습니다. 대구가 아니라 서울말입니다. 지금은 이 돈이면 강남 아파트 한 평 정도 겨우 살 수 있을 겁니다. 제가 태어난 해는 해외여행 자유화 원년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이도 50세를 넘어야 하고, 은행에 예치금도 넣어둬야 하는 등 제약이 많았지만 일반 사람들이 관광삼아 해외로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한 첫 해였죠. 당시 해외여행은 서민들에게는 우주여행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행사가 내놓은 패키지상품 가격을 볼까요? 가장 저렴한 일본 5박6일 상품이 55만 5천800원, 미국 17박18일 상품은 206만 6천400원이었습니다. 일본 상품은 오히려 요즘보다 비싼 느낌이 드든군요. 참고로 당시 대기업에 입사한 대졸 신입사원의 월급이 20만 원 안팎이었습니다.

좀 더 현실적인 물가 이야기를 해 볼까요? 쌀값은 당시 80kg 한 가마니에 6만 7천 원이었습니다. 앞서 대기업 월급과 비교하면 쌀값이 결코 싸지 않았죠? 요즘은 10kg에 2만 4천~3만 5천 원입니다. 한 가마니에 대충 20만~30만 원 정도군요. 잘 비교가 안되신다구요? 당시 일간지에 다방 커피 가격이 300~400원으로 올랐는데 품질은 떨어졌더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지금은 이 돈의 10배를 해야 분위기 좋은 커피숍에서 원두커피 한 잔 할 수 있죠. 돼지고기는 한 근(600g)에 2천 원이던 것이 9천900원으로, 한우는 5천400원에서 4만 6천800원으로 올랐습니다. 라면 한 그릇에 200~250원에서 지금은 딱 10배가 뛰었죠. 당시 지갑에 저 한 장만 있으면 든든했답니다. 극장(2천500원) 갔다가 저녁 식사(1천500원 안팎)하고 커피 한 잔까지 마셔도 잔돈이 남을 정도였으니까요.

세상은 더 빨리 변한다고 합니다. 10년 뒤 제 실질가치는 연 3~4%의 물가상승률을 고려할 때 5천200~6천600원으로 낮아진다는 한국은행 발표도 있었죠. 2009년쯤이면 10만원권이 등장할 예정입니다. 행여 제 막내동생이 지갑에서 천덕꾸러기로 변하지는 않을 지 걱정입니다. 10만원권이 나오면 만원권의 40%(8억장)가 고액권으로 대체된다죠? 세상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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