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유정의 영화세상] 아버지의 깃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버지의 깃발'은 여러 가지 면에서 화제를 불러모으고 있다. 세간의 주목을 끄는 첫 번째 이유는 이 영화가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라는 작품과 한 벌로 기획, 제작되어 동시 개봉했다는 데서 비롯된다. 두 번 째는 영화가 소재로 선택한 사건이 미국현대사에 기록된 실제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세 번 째는 앞에 열거한 두 가지 이유와 결부되는 데 '아버지의 깃발'은 2차 세계 대전에 관한 작품이다.

가장 심각한 네 번 째 이유는 한 벌의 두 작품이 이오지마 섬에 상륙한 미군이라는 사건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륙해서 섬을 정복해야만 하는 자들의 입장이 '아버지의 깃발'이라면 상륙하려는 적을 저지해 섬을 사수해야만 하는 자들의 면면이 곧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서상, 점령국가인 일본군의 내면에 우호적인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의 개봉 여부가 불확실한 까닭도 바로 이 점에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한 쪽의 입장으로 정리 서술되었던 전쟁의 역사를 새롭게 조형하고자 한다. '아버지의 깃발'은 그 첫 번째 결과물이다.

서술했다시피, '아버지의 깃발'은 실존하는 사진 한 장에서 출발하는 이야기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요지인 이오지마에 상륙한 미군들은 정상에 성조기를 꽂는다. 50여일간의 전투 중 15일째 꽂혀진 이 깃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종식된 듯한 환상을 미국에 제공한다. 깃발을 꽂은 것으로 추정된 병사들은 본국으로 소환되고 전쟁 기금 마련 캠페인에 동원된다. 문제는 소환된 병사들이 꽂은 깃발이 최초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 복잡 미묘한 사정 속에서 내려진 첫 번 째 깃발의 주인공들은 영웅이 아닌 시체로 되돌아왔다는 데에 있다.

얼핏 보면 '아버지의 깃발'은 과연 어떤 이야기가 진실일까를 쫓는 작품처럼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좀 더 면밀히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재구성하고자 했던 것은 사건의 진실이 아니라 사건이 감춰 놓은 수많은 유혈의 역사이다. 세 사람의 생존자들의 내면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은 그들의 영웅적 면모가 아닌 피해자로서의 면면이다. 전쟁터에는 그 어떤 영웅도 없다는 것, 살아 돌아온다는 것 자체는 영웅의 면모가 아닌 쓸쓸한 생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영화는 내내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깃발'은 인생의 깊은 고뇌와 상실을 이야기했던 '밀리언 달러 베이비'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계몽적인 면을 띄고 있다. 전쟁은 그 어떤 영웅도 낳을 수 없는 잔혹한 살해극에 불과하다는 감독의 전언이 곳곳에서 묻어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전쟁을 스펙터클의 소재로 삼는 것이 아니라 반성의 질문으로 던져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이스트우드 다운 품위를 보여준다. '아오지마에서 온 편지'라는 타자적 언어에 귀를 기울인 시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전쟁은 공포스러운 상처가 아닌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죄악이자 광기라고 할 수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 광기를 시뮬레이션화하는 정치적 행보에 날카로운 시선을 견지한다. 전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도 모른 채 수량으로 집결될 결과물에 집착하는 광인들, 그들로 인해 세상은 더 폭력적인 장소로 돌변한다. 피해자만이 남는 곳에서 영웅이라는 허상을 만들어내는 정치의 논리,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두려운 전장의 내면일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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