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어떤 부탁

병을 치료하는 데는 의사와 환자의 신뢰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틀에 짜인 의료제도 때문에 환자와 의사는 서로에 대해 알 길이 별로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환자와 의사가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의사들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그들만의 애환도 있을 겁니다. 의사들의 생각과 일상들을 '의창'(醫窓)이란 칼럼에 담아보겠습니다. 필진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호영(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윤현대(라파엘내과 원장·전 대구가톨릭대 교수) ▷최성진(최진치과 원장) ▷송광익(늘푸른소아과 원장·대구시의사회 공보이사).

우리가 살다 보면 부탁할 일도 많이 생기고, 또 부탁을 받는 일도 많이 생긴다. 그런데 부탁을 하는 경우를 놓고 보자면 사람들마다 참 많이 다르다. 여간해서는 부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것 아닌 부탁도 일일이 꼭 하거나 아주 어려운 부탁도 너무 쉽게 하는 사람도 있다.

대학병원에 근무하다 보면 환자에 대한 부탁을 참 많이 받게 된다. 부탁의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 차라리 내가 직접 담당하는 환자의 경우라면 비교적 큰 어려움은 없지만 다른 진료과 또는 다른 병원의 경우라면 사정은 매우 달라진다, 내가 다시 부탁을 해야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쪽의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수술 중이나 외래 진료 중에 급하다며 전화를 해서 학교 동창생이라면서 자기 직장 동료의 친한 친구의 친척이 다른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부탁을 해 달라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다. 부탁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환자에게 확실하게 안부를 전하는 방법도 되겠지만 중간 전달자의 입장에선 난감한 일이 많다.

내가 겪었던 가장 황당했던 에피소드 하나. 그날도 바쁜 외래 진료 중에 간호사가 급한 전화라며 건네기에 받았더니 나하곤 만난 적 없는 중학교 동창생이라며 다른 과 환자의 상태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래서 그 환자분과 어떤 관계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어떤 섬에 바다낚시를 와 있는데 마침 옆자리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의 지인이라고 해 그 엉뚱함과 자상함에 아연실색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가끔씩은 황당하기도 하고 당황스런 경우도 있지만 모두가 사람이 아픈 것과 관련되기에 부탁하는 입장에선 얼마나 답답할까 싶어 되도록 성가신 내색을 감추려고 애를 쓴다. 이러한 부탁들의 배경에는 아무래도 아는 사람을 통하면 어려운 것도 쉽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회적 통념도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 넓은 인간관계를 과시하고 싶어 나서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몇 사람을 건너서 가는 부탁의 경우엔 해당 환자 자신도 부탁한 사람이 누군지 몰라서 어리둥절해 서로 민망한 경우가 많고, 너무 많은 경로와 사람들을 동원하는 경우는 부탁 때문에 업무가 방해돼 오히려 반감을 갖기도 한다.

이렇게 기억조차 힘든 수많은 부탁들이 있었지만 나에게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환자 한 분이 있다. 7년쯤 전에 수술을 받으러 오신 분이었는데 이렇게 이야기했다. "교수님, 저는 대구에 온 지도 몇 년 안돼 아는 사람도 별로 없어 딱히 부탁할 곳도 없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제 수술을 하실 것인데 결국 제가 아는 사람은 교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이 수술을 받고 퇴원할 때까지는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그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정호영(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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