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장에 근무하게 된 이후 불편 아닌 불편을 겪는 일이 하나 있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종종 서로의 근무지를 묻게 되는데, 첫마디에는 그냥 회사를 다닌다고만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사소하지만 사뭇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무심결에 처음부터 골프장에서 일한다고 말하면 시를 쓰면서 골프장에서 일하다니 낯설다는 반응이 뒤따르고, 더 나아가 상대는 내가 매주 라운드를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무직이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상대의 부러움에 찬 오해는 막을 내린다. 그때마다 겪게 되는 어긋난 이해의 난감함이란….
그런 종류의 이해(?)가 전적으로 마음 편하지만은 않다. 글을 쓰면서 틈틈이 운동을 해 골프 생활체육지도자 자격을 취득했지만, 라운드를 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과 근무시간 외적인 여건들, 교통사고 이후 회복되지 않은 몸 상태 등 상황이 여의치 않은 지금의 내게는 '행복한 금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며칠 전, 모처럼 제시간에 업무를 마치게 되어 내가 '죽림호걸'로 이름 붙여둔 에드워드 코스 대숲으로 산책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그림자도 차츰 숨죽이고 제 모습을 가다듬는다는 고요한 薄暮(박모)의 시간, 잔디밭 저편에 흰 구슬 같은 것이 여린 빛을 받아 반짝였다. 다가가 고개를 숙여보니, 흔히 말하는 로스트볼이었다.
원인이야 어찌 되었건 플레이어 본인이 쳐놓고도 '공'을 잃어버려 다른 공으로 대체해서 라운드를 이어가는 경우가 골프에서는 흔한(?) 일이다. 그때 적용되는 골프 룰은 차치하고라도, 공을 잃어버린 사람은 얼마나 애를 태웠을까. 벌칙이 주어지기 직전까지 허용된 시간을 사용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캐디를 독려해 수색을 해 봤을 터. 더군다나 그 공은 흠집도 별로 찾아볼 수 없는 새것이었다.
그냥 가려다 산책에서 얻는 덤이거니 생각하고 무심히 집어들었는데, 주인을 잃고 주인이 잃어버린 그 골프공에는, 작가가 누구인지 자신만이 아는 주홍빛 나비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동반자끼리 볼 제조사의 브랜드나 숫자까지 같은 경우들이 종종 있기에 특이한 무늬를 그려 넣거나 서명을 하기도 하는데, 이 공에는 특별히 나비 한 마리가 동참한 것이다. 초보자를 위한 캐디의 배려일 수도, 플레이어 개인이 자기긍정의 메시지를 담았을 수도 있다.
詩(시)적인 이 선수, 아무리 높이 날아가도 중력에 의해 지상으로 내려앉고마는 골프공의 물리력을 간파했을까. 나비의 몸을 빌려 더 멀리, 어쩌면 먼 무지개 너머로 자기를 날려 보내고 싶은 무한한 꿈의 한계고도를 설정해 둔 것인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공의 주인은 타수에만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코스의 여백을 볼 줄 아는 진정한 프로가 아닐까 상상하게 된다.
이 나비의 주인에게 골프공이 도화지였듯 골프장의 잔디는 내게 푸른 원고지와 같아서, 이 상상의 원고지 위에서는 스코어카드를 기록하는 흑연심지 연필 한 자루가 흰 골프공을 대신하기도 한다. 내가 즐겨 쓰는 만년필 한 자루는, 숙련을 거듭했을 때 어느 상황에서든 온전히 비거리를 제어할 수 있는 나만의 7번 아이언에 다름 아니다.
근무처가 골프장이라는 이유로 무한 제공되는 '퇴근 후 골프장 산책'. 가끔 퍼팅 연습장에서 저녁달빛을 맞을 때도 있지만, 골프장 생활에서 시와 닿아 있는 소재를 발견하고 상상과 변주 속에서 한 편의 글을 갈무리할 때의 기쁨은, 난코스에서 맞닥뜨린 벙커에서 탈출에 성공한 골퍼의 코스공략에 견줄 수 있으리라. 내 글쓰기에 필요한 다양한 공략법 또한 연마를 거듭해야 할 것임을 깨닫는다.
스카이라인을 향해 쏘아 올리는 호쾌한 드라이버, 페어웨이에서의 날렵한 아이언, 절호의 어프로치와 그린 위에서의 혼신의 퍼팅. 오늘도 나는 골프장에서 시와 함께, 시의 로스트볼을 찾아 홀아웃(hole-out)하는 나만의 라운드를 한다. 다음 주말에는 헨리코스 쪽 詩(시)와 만나기로 일찌감치 '부킹'을 해 두었다. 이 봄, 자기만의 로스트볼을 찾는 한 주가 예약되기를 바란다.
이민아(시조시인·2007년 매일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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