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프로페셔널/안대회 지음/휴머니스트 펴냄
박제가가 쓴 '묘향산소기'에는 검무를 잘 추는 '운심'이라는 기생 이름이 등장한다. 경남 밀양 출신으로 서울에서 이름난 검무 명인 운심의 특기는 양손에 칼을 들고 추는 칼춤이다. 운심은 당시 널리 유행하던 춤의 최고봉에 올랐다. 도도하고 춤 잘 추는 기생으로 그녀의 명성은 18세기를 넘어 19세기에까지 전해졌다.
한 가지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을 18세기에는 벽(癖)과 치(痴)라 불렀다. 무리와 다른 짓을 하는 별종으로 손가락질받는 사회 마이너리티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책에는 오늘날 프로페셔널로 대접받고 있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 간 탓에 사회 변방으로 밀려난 10명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이 담겨 있다. 여행가, 프로 기사, 춤꾼, 만능 조각가, 책장수, 원예가, 천민 시인, 기술자 등 역사책에 한 줄 이름도 올리지 못한 사람들이다.
18세기 후반 창해일사(滄海逸士)라 불린 정란. 경상도 출신 사대부인 그는 단지 여행이 좋아서 조선 천지를 발로 누볐다. 종으로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횡으로는 대동강에서 금강산까지, 산천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 여행가였다.
조선 영·정조 시대 화가 최북의 자는 칠칠(七七)이다. 북(北)을 좌·우로 나누면 칠칠이 된다. 학자들은 칠칠이란 말이 미천한 신분의 못난 놈임을 반항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작명이 기발한 것처럼 최북의 일생 또한 기행으로 얼룩져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체질적으로 자유분방한 예술가의 천성을 타고난 최북의 삶은 '광기' 바로 그것이었다. 한 귀인의 그림 부탁을 거절해 협박을 받자 자신의 한쪽 눈을 찔러 멀게 했다는 일화는 고흐가 제 손으로 귀를 자르고 명나라 화가 서위가 송곳으로 제 귀를 뚫은 이야기와 일맥 상통한다.
화훼전문가 유박은 꽃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18세기 인물 가운데 단연 으뜸이다. 자신이 직접 '백화암'이라는 화원을 경영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화훼 전문서 '화암수록'을 저술했다. '화암수록'은 조선 전기 강희안이 지은 '양화소록'과 짝을 이루는 귀중한 책이다. 유박은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과거를 보거나 벼슬을 하지도 않았다. 황해도 배천군 금곡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꽃을 가꾸는 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런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천민 시인 이단전도 빼놓을 수 없다. 1781년 어느 봄날 못생긴 청년 하나가 재야 문단의 권력을 한 손아귀에 쥐고 있던 73세의 대작가 이용휴를 찾아왔다. 그 청년은 소매자락에 넣고 온 시집을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천천히 시집을 훑어보고는 좋다 나쁘다 말도 없이 곁에 있던 벽도화(碧挑花) 가지 하나를 꺾어 청년에게 주었다. 청년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가 빙그레 웃으며 제자 가섭에게 꽃을 주어 그를 인정한 염화시중(拈華示衆)이 떠올랐기 대문이다. '내 너를 훌륭한 시인으로 인정하겠노라.'라는 마음이 벽도화 한 가지로 표현된 것이다. 이용휴로부터 상찬을 받은 청년이 바로 이단전이었다.
책을 통해 평생 음악에 빠져 살았던 김성기, 조선 제일의 바둑 기사 정운창,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정철조, 조선 최고의 출판 마케터 조신선, 자명종 발명에 삶을 던진 천재 기술자 최천약의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18세기 프로페셔널은 조선 왕조의 근간이 되는 주자학적 인간관, 세계관과 결별하여 주체적으로 살려는 의지를 보였으며 세계와의 불협화음을 감내하며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갔다."며 "틀 속에 안주하려 하지 않고 틀을 벗어난 생각과 행동으로 그 시대의 고독한 창조자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436쪽, 1만 9천 원.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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