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을 다시 읽습니다. 누렇게 빛바랜 책의 맨 뒷장에 '1977년 4월'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오늘 아침, 왜 책꽂이 한쪽 귀퉁이에서 오래 먼지 쌓인 채 잊힌 그 책에 손길이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연하게도 스무 살 무렵의 내가 신비철학의 창시로서의 텍스트였던 이 책을 산 계절도,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썼다는 이상한 책들 같은 봄날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의 벌레들이 스멀거렸을 책장을 넘기며 나도 '오래된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며, 화로 앞에서 풀무질을 하고 있는 어느 연금술사의 사진을 보고 있는데 전화벨소리가 울렸습니다. 전화벨은 저 혼자 울리다 끊어졌고, 파가니니 CD가 벌써 몇 번째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마음에 드는 노래나 곡이 있으면 제풀에 물릴 때까지 듣고 또 듣곤 합니다. 참 맹목적인 사랑입니다.
요즈음 아침이면 베란다에 나가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야생화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내 생활 속의 작은 기쁨입니다. 가만히 눈 맞추기도 하고 말을 거노라면 봄 햇살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지 따뜻합니다. 긴긴 겨울을 잘 견뎌주고 기다려 이 봄날 꽃피우는 저것들이 얼마나 고맙고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마치 이야기 씨방이 터져 재재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습니다. 젖니 나듯 쏙 고개 내민 고 새끼손톱보다 작은 꽃잎 속에 하늘대문도 보이고, 별님 달님도 보일 듯합니다. 그러고 보니 '누운주름잎'이라 연보라빛 연서 같은 그 꽃만 편애하는 것 같아 다른 꽃들한테 조금 미안하긴 합니다. 아무튼 하늘무덤가에 핀 꽃이라고 내 마음대로 상상해버린 꽃이기도 합니다.
지난주엔 수성못가에 사는 그림 그리는 이로부터 초대를 받았습니다. 해질 무렵, 장소는 그녀의 아파트에 있는 목련나무 아래였지요. 정말이지 한걸음에 달려가 안기고픈 우람한 목련이었습니다. 하얀 목련을 보면 살풀이춤을 추는 여인이 연상되곤 했는데 왠지 남성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그날 '목련제'라 명명하여 나무 발치에 와인도 한 잔 쳐 주었는데요. 석양의 시간은 꽃이 피는 절정의 순간의 몽롱함으로 붉어져서는 꽃그늘 아래 앉은 이들의 얼굴도 붉게 물들였습니다. 근데, 그날 밤 목련나무는 잠을 설치며 뒤척거리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어느 시인이 '꽃 피는 나무의 괴로움'이라고 했던가요? 꽃이 핀다는 것은 꽃잎 속에 숨은 우주가 꽃문을 열고 나온다는 것인데, 그 순간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을까요? 아프다는 건 자신에게 비수를 들이대는 일이기도 할 텐데, 꽃나무의 비극은 제 비명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봄은 그리움의 계절인가 봅니다. '그립다'라는 형용사는 그림을 '그리다'라는 동사에서 전성된 말이지요. 예술의 형식으로 볼 때 '그립다'는 회화적이라 하겠습니다. 봄의 연금술사는 그리움이라는 돌림병을 복병처럼 내세워 쳐들어와 막무가내로 들쑤셔놓고 어디로 숨은 걸까요? 연금술은 불의 사제들이 꾸었을 몽상이거나 백일몽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도 아직 연금술을 이해하려면 멀었나 봅니다.
시인들은 상상만 먹고도 배고프지 않을 사람들이란 생각을 종종 해봅니다. 시를 쓸 때면 참 근사한 꿈을 꾸지요. 시는 언어라는 기호로 강을 건너는 것이지만, 내 마음이 물결치는 대로 갈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곳은 언어가 닿을 수 없는 곳이지요. 터무니없고도 황당무계한 꿈, 세상의 모든 不可(불가)한 것들을 꿈꾸는 시간은 지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또 불행하기도 합니다.
낙화의 계절이 돌아옵니다. 꽃나무가 그토록 끔찍한 헌신과 열망으로 꽃을 피웠듯이, 미련없이 제 꽃잎을 버릴 것입니다. 천둥 번개 같은 꽃을 매달려고 안간힘 쓰며 무수히 헛발질을 해댔을 허공에 말입니다. 꽃이 피고, 진 자리가 시큰거리고 환한 까닭입니다.
강해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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