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교통사고 식물인간…조각난 코리안드림

필리핀 근로자 넬란띠 씨

▲ 교통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채 7개월째 대구가톨릭병원에서 투병중인 필리핀인 왕사안 넬란띠(30) 씨를 부인 제니퍼 씨가 간호하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 교통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채 7개월째 대구가톨릭병원에서 투병중인 필리핀인 왕사안 넬란띠(30) 씨를 부인 제니퍼 씨가 간호하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비운(悲運). 어떠한 말로도 그가 겪어야 했던 상황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허우적댈수록 더 깊은 늪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는 운명이 그의 앞을 막고 선 듯했다. 그는 단지 먹고 살기를 원했던 평범한 한 가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소박했던 바람과는 달리 죽음의 그림자 앞에 서 있었다. 그가 꿈꿨던 '코리아 드림' 역시 사그라지고 있었다. 매달 30만 원을 필리핀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았던 남자. 한국 축구가 좋아 붉은 악마 티셔츠 수 십 벌을 필리핀으로 보냈던 남자. 운명의 여신은 그러나 그에게서 영혼마저 앗아가 버렸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식물인간이 돼 버린 필리핀인 왕사안 넬란띠(30).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도 그는 여전히 병원비라는 질긴 악연과 또 다른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지난 1월 7일 오전 2시.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늦은 퇴근시간.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자취방으로 향했다. 종일 섬유공장에서 일한 탓에 피곤이 몰려왔지만 필리핀에 두고 온 두 딸을 생각하며 두 눈을 부릅떴다. 뒷좌석에 타고 있는 직장 동료도 힘이 됐다. 5분 후면 도착 시간. 이날따라 교차로의 신호가 길게 느껴졌다. 신호가 바뀌자 그는 가속 페달을 밟았다. 순간 번쩍이는 강한 빛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손 쓸 겨를도 없이 그의 오토바이는 트럭과 부딪쳤고 아스팔트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트럭과 정면 충돌했던 그날 사고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세 차례에 걸쳐 뇌수술을 받았지만 의식은 회복되지 않았고 사고 책임마저 모두 떠안게 됐다. 뒷좌석에 탔던 필리핀 동료는 트럭이 신호를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보험사도, 섬유 회사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외쳤던 '코리아'는 그렇게 그를 외면했다.

한 달 후 그의 아내 제니퍼(29)가 입국했다. 삶의 전부였던 남편의 모습에 그녀는 온몸을 떨었다. 눈물만 쏟아내던 그녀는 그 후 남편의 수족이 됐다. 죽은 뇌를 걷어내는 수술을 받은 남편은 신경이 마비됐고 팔 다리가 굳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일 같이 남편의 앙상히 뼈만 남은 다리를 주무르고 어루만졌다. 병원에서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제니퍼는 남편이 몇 달에 한 번씩 필리핀으로 월급을 보낼 정도로 한국에서의 생활이 어려웠다고 했다.

그의 불운은 2003년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올 때부터 시작됐다. 첫 직장이었던 섬유공장은 그가 입사한 후 6개월 만에 부도가 났다. 6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월급을 받지 못했지만 한국말을 하지 못했던 그는 결국 돈 받기를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곧 다른 섬유공장으로 옮겼지만 이곳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두세 달씩 월급이 밀렸고 작업을 하지 않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간혹 60만 원의 월급을 받을 때마다 꼬박꼬박 필리핀으로 송금했다. 10살, 6살 난 두 딸의 생계가 걸린 돈이었다. 지난해 연수가 끝났지만 그는 한국에 오기 위해 진 빚조차 갚지 못했다고 했다. 결국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또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7일 만에 난 교통사고 때문에 그의 코리안 드림은 산산조각 나 버렸다.

3일 오전 11시 대구가톨릭병원 중환자실. 사고 후 몸무게가 30kg이나 빠져버린 그는 핏기없는 얼굴로 천장을 향해 큰 눈망울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병상을 지키던 아내 제니퍼는 그의 이마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미 병원비는 3천만 원을 훌쩍 넘긴 상황. 보험금도 월급도 없는 제니퍼에겐 병원비 외에도 필리핀에 두고 온 두 딸의 끼니도 걱정이었다. 만리타국, 남편의 죽음 앞에 아이들까지 걱정해야 하는 그녀는 짓물러 터져 붉게 변한 눈가의 눈물을 조용히 닦아내며 설움을 이겨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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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미기자 bor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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