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호랑이 교수님

레지던트 시절에 매우 무서운 교수님이 계셨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교수님께서 회진을 할 땐 환자가 잘 낫고 있어도 항상 레지던트들에게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꾸중을 듣는 당사자야 무척 곤혹스럽지만 진풍경을 놓치지 않으려는 구경꾼(의사와 간호사)들이 사방의 병동에서 모여들었다. 교수님은 수많은 말들을 남기셨는데 그 중의 몇 가지는 지금도 외과 동문들의 술자리에서 꾸준히 안줏거리로 등장을 한다.

당시 우리들 나름대로 세수할 시간도 없이 부지런히 뛰어다녔는데도 "이놈들아! 가운만 펄럭거리면서 부지런히 폼 잡고 돌아다니면 다 의사냐?"라는 꾸중을 들으면 억울하기도 했고 항상 더 많은 것을 요구했던 교수님이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그래서 교수님께 조금이라도 반박해 볼 속셈으로 책이라도 좀 읽고 "그렇지만 제 생각엔…." 했다가는 당장 "생각하지 마! 머리에 든 것도 없는 놈들이 부지런하게 생각까지 하면 더 위험해! 절대 생각하지 말고 그저 시키는 대로나 해!"라는 말씀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론 나름대로 생각을 좀 해서 일을 해 놓으면 "야 이놈들아! 네 놈들이 얄팍한 책 하나 겨우 읽고서 부지런히 방해를 하는구나. 도대체 이렇게 부지런히 해코지를 하는데도 멀쩡한걸 보면 환자가 워낙 튼튼하다. 이놈들아!"라는 호통이 떨어졌다. 그러나 회진 뒤에는 그 환자와 보호자까지 우리를 위로해주는 훈훈한 미담(?) 속에서 괴롭고 힘들다는 외과 레지던트 시절도 수많은 애환과 일화 덕분에 순식간에 흘러갔다.

전문의가 된 직후 혹한의 두 달 훈련 끝에 드디어 벚꽃이 필 무렵 반짝이는 계급장을 달고 대위로 임관을 했다. 그렇게 전방 사단의 군의관으로 배치가 됐는데 선임 군의관들이 베풀어 준 환영 식사 자리에서 나온 우스갯소리 중에 내게는 놀라운 이야기가 있었다.

군대에는 네 가지 인간형이 있는데 세 가지는 군대에 필요하지만 한 가지는 절대 필요 없다고 했다. 첫째, 명석하지 못하고 게으른 자는 '졸병'을 하면 되는데 명석한 상관이 꾸중하면서 데리고 일을 시키기에 꼭 필요하단다. 둘째, 명석하고 부지런한 자는 '참모'를 하면 명석한 두뇌로 부지런히 상관도 보좌하면서 동시에 게으른 부하들도 독려하니 꼭 필요하단다. 셋째, 명석하고 게으른 사람은 '지휘관'에 필요한데 명석한 두뇌로 판단만 잘하면 부지런한 참모와 참모가 시키는 대로 하는 졸병이 다 맞춰 준단다. 물론 지휘관도 부지런해야 당연하겠으나 행간의 숨은 뜻은 지휘관이 너무 부지런하면 참모가 할 일도 없거니와 부하들은 못 견디고 이탈하니 '적당히'하라는 뜻일 것이다. 넷째가 절대 필요 없다는 인간형인데, 명석하지 못하면서 부지런한 사람이란다. 실수투성이에 부지런하기까지 하면 돌아다니는 '흉기'로 온 동네에 사고를 치면서 다니므로 군대에서는 불필요하며, 특히 최악의 경우는 이런 자가 지휘관을 맡는 경우란다. 한때 군에서 나돌던 유머이긴 하지만 우리 사는 어느 곳에서나 생각해 봄직도 하다.

생명을 보살피는 의사에게 '부지런함'은 당연한 덕목이겠으나 먼저 '정확한 판단'이 그 길잡이가 돼야함은 더욱 당연하다. 계속되는 실수로 매번 "이번의 실수를 '거울'삼아서…."라는 사과를 연발하는 사람에게 주신 그 교수님의 꾸중은 지금도 전설로 전해진다. "지난번 그 '거울'들은 다 어떻게 했어? 모조리 다 깼어?"

정호영(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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