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향촌동 살릴 길은 없는가?

◇ 윤장근 "향촌동을 잊을 것인가?"

향촌동 피란문학 거리는 흔적조차 희미했고, 현지 답사만으로는 당시 상황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윤장근 선생(77.소설가.죽순문학 명예회장)은 노구를 끌고 후텁지근한 향촌동 골목을 기꺼이 걸었다. 그는 한마디 한마디 정확하게 전달하려 애썼고, 기자의 메모상태를 확인하기도 했다. 하나라도 틀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무척 더운 날씬데 힘들게 해서 죄송하다.'는 말에 '자네 일이 아니고, 나의 일이다.'라며 앞서 걸었다. 이제 충분하다 싶었는데도 그는 설명을 덧붙이고 또 덧붙였다. 그는 마치 '피란기 향촌동 문학'의 행장을 쓰는 사람 같았다.

칠순 후반의 나이에도 그는 술을 빼놓지 않았다.

"향촌동을 이야기하려면 술잔을 앞에 놓아야지. 마른 목으로 무슨 이야기를 해!"

그는 전날 처음 만나서도 곧장 술집으로 향했고, 향촌동 순례길에서도 술집을 빼놓지 않았다. 대낮임에도 거리낌없이 술을 마셨고, '이 잔을 비우고 일어나자'고 해놓고 '여기 한 병 더!'를 거듭 외쳤다.

문학과 더불어 술잔에 낭만을 담아 마시던 그들이었다. 그런 모습들은 이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앞서 걷는 윤장근 선생의 걸음이 종종 흔들렸고, 그의 걸음이 흔들릴 때마다 '향촌동 문학'이 길바닥으로 쏟아져 사라질 것 같았다. 실제로 문인들이 떠난 지 반세기, 향촌동에는 그 기억마저 잊혀지고 있다.

"향촌동을 빼놓고 50년대, 60년대 한국 문학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중섭과 인연으로 따지자면 향촌동이 서귀포만 못할까? 그런데도 '이중섭 거리'는 제주도 서귀포시에 있다. 우리 대구는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선생의 말은 옳았다. 당시 대구 향촌동에 시인 구상과 화가 이중섭만 있었을까. 백기만, 마해송, 박두진, 이윤수, 조지훈, 김광섭, 박목월, 유치환, 이호우, 장덕조, 최정희, 최태응, 정비석 등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 좁은 골목을 풍미했다. 여성 문인이 귀하던 시절 '향촌동의 꽃'으로 불리던 시인 서정희의 로망스가 있었던 곳도 향촌동이었다. 그녀가 육신의 한계와 시류의 비정에 홀로 울다가 떠난 곳도 향촌동이었다. 향촌동은 피란 시절부터 60년대까지 한국문단의 중심이자 문화'예술의 요람이었다.

◇ 중구청 "향촌동 골목에 입간판 설치"

반세기가 흘렀지만 문인들이 걷던 향촌동 좁은 골목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그들이 조촐한 출판 기념회를 열었던 건물은 낡은 모습이지만 더러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골목에서 문학의 자취를 찾을 수는 없었다. 시인묵객들이 술집과 다방은 모두 간판을 바꿔 달았다. 1950년대 피란문학의 본거지가 잊힐 위기에 놓인 것이다.

윤순영 대구시 중구청장은 "중구는 옛 골목과 대구의 문화가 집적된 곳이다. 대구가 외부로 영역을 확장을 거듭하는 동안 옛 중심이 약화돼 아쉽다. 골목이 살아야 도시가 산다. 경상감영공원과 향촌동 일대를 '실버타운'으로 특화하자는 목소리와 '문학거리'로 해야한다는 목소리 등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고 했다.

윤 청장은 "'향촌동 피란문학거리'의 경우 경상감영 공원쪽 입구와 북성로쪽 입구, 그리고 중요한 건물 앞에 설명과 옛 사진을 덧붙인 입간판 설치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관청의 힘만으로 골목과 상권을 살릴 수는 없다. 일대 주민들의 자연발생적인 의지와 의견이 모아져야 한다."며 일대 주민들의 협조도 당부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