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미술순례/서경식/창비
대학원 첫 학기를 마칠 무렵, 내 손에 문고판 책이 한권 쥐어져 있었다. 이틀 만에 정신없이 읽었던 것으로 보아, 나는 이 책을 무척이나 열정적으로 탐독했던 것 같다.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순례'. 이 책이 바로 20대 중반, 여름이 막 시작되던 무렵에 나를 뜻모를 열병으로 몰아넣은 책이다. 서경식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신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71년에 간첩 누명을 쓰고 옥고를 치러야 했던 재일교포 유학생 서승과 서준식의 동생이다.
두 형의 예기치 않은 운명은 이들 가족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이 돼버렸다. 결국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잇달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형들은 출소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희망의 빛은 보이지 않을 무렵, 서경식은 누이와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다. 1983년, 이들 남매는 보이지 않은 운명의 힘에 떠밀리듯 유럽의 도시들을 배회했고, 더 많은 시간을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놓여진 가혹한 운명을 닮은 수많은 그림들과 대면하게 된다.
'서양미술순례'는 한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예술작품과 더불어 관통해왔던 시절의 기록이다. 여정 자체는 일반적인 미술기행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가 느끼고 사유한 것은 여느 미술기행과는 달랐다. 그는 서구의 대가들의 그림 앞에서 감옥에 있는 형을 수도 없이 떠올렸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운명에 짓눌린 누이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한가로운 기행이 아니라, 눈물을 뿌리고 상처를 후벼 파는 여정, 순례와 같은 것이다. 책의 제목이 '기행'이 아니라 '순례'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책은 큰형 서승이 출소한 직후인 1991년에 쓰여졌고, 92년에 국내에 소개됐다. 미술작품을 통해 삶과 역사에 대해 되돌아보게하는 작가의 진정성 때문에 이 책은 오랫동안 사랑받았고, 몇 해 전에는 컬러 화보가 들어간 개정판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흑백 그림이 들어있는 초판본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어쩐지 책 속의 '미술 순례'가 책의 빛깔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이 책에는 노신의 명구가 나온다.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빛과 어둠으로 범벅된 수많은 명화 앞에서 지은이는 때로는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희망을 보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그 참담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심정이 문장 한줄 한줄에 고통스럽게 쓰여 있다. 미술기행 책이 마구 쏟아지는 요즘에 이 책이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진이 대구MBC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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