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 도심 속의 외로운 유목민

우아한 청춘의 남녀가 부부로 탄생했다. 하객들이 웃음과 담소를 양념처럼 버무리며 음식을 먹는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가고,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아직도 그들의 체온이 배어있는 빈 의자들만 덩그러니 남았다.

쓸쓸한 풍경이다. 문득, 외로움을 느낀다.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물과 목초를 찾아 이동하던 유목민처럼 홀로, 혹은 무리를 지어 다음의 목적지를 향하여 떠났을 것이다. 하릴없이 돌아온 나를 맞는 것은 아이들이 장성해서 떠나버린 빈 집의 적적함이다.

식탁 위의 신문을 집어 든다. 이름난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의 글이 눈에 띈다. 청취자들이 응답한 외로움에 대처하는 방법과 함께 자신의 소회를 적은 글이다. 사람들의 외로움은 뜻밖에도 깊었다. 밥을 먹으며 밥알을 세기도 하고, 보리과자 두 봉지를 쏟아 놓고 어느 것이 개수가 많은지를 가려내기도 하고…. 무엇보다 압권은 자신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또 답장을 한다는 것이다.

'지독히 고독할 때면 산을 오른다. 요즈음은 청진기를 품속에 지니고 간다. 나무들에게 그것을 대고, 너는 얼마나 쓸쓸하니, 그리고 또 너는… 하고 묻는다'는 어느 중진 문인의 표현이 떠오른다. 그렇듯 홑이불로 슬쩍 가려져 있어, 바람 한 번 일렁이면 와락 뛰쳐나올 외로움들이 도처에 가득하다.

인간은 왜 그렇게 외로운 것일까. 사람들을 연결하는 통신수단의 발전은 가히 혁명적이다. 우리를 이어주는 물리적 장치는 그렇듯 눈부신데 진정한 소통이란 것이 이루어지고 있기나 한 것인가. 역설적이게도 통신매체의 범람이 도리어 그것을 어렵게 한다.

독서실의 칸막이처럼 자폐의 공간에서도 바깥과의 접속이 무한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다수와의 접속으로 관계의 폭은 넓다. 그러나 그저 표피적인, 일방적이고 선택적인 접속일 뿐 관계의 깊이는 없는 것이다. 말은 난무하되 속내 깊은 대화는 없다. 비밀번호로 무장을 하고, 자신만의 공간에 안주하면서 물 위의 기름처럼 서로 겉돌 뿐이다. 그것이 외로움을 부추긴다.

그것은 온라인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공간의 밖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광범위한 교제만 빈번하게 일어난다. 외교적 수사들만 가득하거나 더 크지도, 더 작지도 않을 도토리 키들을 서로 견주어 보려 하는, 공식적이고 형식적인 만남 후의 귀가 길은 늘 공허하다.

객창에 걸린 달빛보다 도시의 소음과 군중 속에서 더욱 진한 외로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럴 땐 발길이 터벅터벅 소리를 낸다. 숲을 이루지 못하고 도심에서, 거리에서, 공해와 소음에 시달리는 나무가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그러나, 하늘 아래 홀로이지 않은 존재가 어디 있으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인의 말은 외로움은 인간이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것인가. 인간은 일생을 통해 그것을 주재할 의무 또는 권리를 갖는다. 육신을 싸고 있는 피부처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그렇다면 그 쓸쓸한 감정에 '농락' 당할 일이 아닌 것이다. 사실, 외로움이란 고급 감정이다. 희로애락에 대한 상위의 개념이다. 어떤 이는 길을 떠나 눈물이 펑펑 쏟아질 만큼 고독감을 느낄 때 여행의 묘미를 얻는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러 집을 떠나 자신의 내면과 가장 고요하게 만나는 시간을 즐긴다는 것이다. 소금에 전 배추처럼 발효된 외로움은 인간을 성큼 키우는 밑절미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무리로부터의 단절을 즐기지 못할 양이면 무리로 다가서는 길밖에는 없다. 등 돌린 만큼 외로운 것이니…. 타인이 손 내밀기 전에 자신이 먼저 손잡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사람에게 걸어 가보는 것이다. 행복 만들기도 개인의 재량에 달렸다고 한다. 외로움을 주재할 별다른 역량이 없는 우리는 물과 목초를 찾아 떠나는 유목민처럼 사람을 찾아, 소통을 찾아 집을 나서야 하리.

남영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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