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광장] 희망 프로젝트, 민주

혼자서는 밥을 먹을 수도, 옷을 입을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없는 그녀가 딸을 낳았다. 아이는 2.8kg의 건강한 모습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장애를 가진 몸으로 태어나 부모에게 버림받고 지난해까지 중증장애인을 수용하는 시설에서 살아온 그녀.

지금도 남편을 빼닮은 아이를 바라보는 일 외엔 어떤 일도 해줄 수 없다. 하지만 똑같이 일어나고 밥먹고 서러움과 그리움으로 흘리는 눈물조차도 타박과 체벌로 되돌아오는 그곳에 자신의 딸 민주를 보내는 일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다.

남편 역시 1급 장애인으로 딸을 위해 젖병을 소독할 수도, 기저귀를 갈아줄 수도, 불편해서 우는 아이를 업어줄 수도 없다. 그러나 그녀에게 남편과 딸은 평생 처음 가져보는 가족이요, 여느 가정처럼 행복하게 꾸미고 지켜가고 싶은 소중한 보금자리다.

이들 장애인 부부가 딸을 곁에서 지켜보며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희망의 실마리는 '국가의 제도'와 '이웃 아줌마의 사랑'에서 시작됐다. '활동보조인제도'는 활동보조인을 파견해서 장애인의 일상생활을 지원하는 제도다.

좋은 제도지만 국가가 당사자에게 필요한 제도라고 하여 알아서 시행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겠다. 왜냐하면 이 제도를 도입시키기 위해서 지난해 여름, 전국의 수많은 장애인과 장애인 부모들이 뜨거운 거리에서 흘린 눈물과 땀을 간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활동보조인제도'는 올 5월부터 본격 시행돼 많은 장애인들이 지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제도'만으로 민주를 키울 수는 없었다. 이 제도에 따르면 민주네에 주어진 시간은 다른 사람보다 많은 하루 5시간 남짓, 24시간 엄마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갓난아기가 엄마 곁에서 자라는 일은 불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부모라도 아이는 부모의 훈기로 자라야 한다고 믿는 한 '이웃아줌마'의 조건없는 사랑으로, 민주는 엄마 아빠 곁에서 옹알이를 하고 몇 번의 실패 끝에 뒤집기에 성공해 그 부부에게 '믿을 수 없는 행복'을 선사하며 자라고 있다.

지난해 장애를 가진 자신의 딸을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시킨 이웃아줌마는 딸 대신 다른 장애인을 돌보는 활동보조인으로 나섰고, 그때 만난 민주 엄마(당시에는 민주가 태어나지 않았지만)의 친정 엄마가 돼서 민주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돌봐오고 있다. 그리고 하루 10시간 이상을 민주를 돌보는데 기꺼이 쓰고 있다. 그것은 제도를 뛰어넘는 그녀의 인정이며 사랑의 실천이었다.

그러나 부족한 제도가 개인의 인정에 기대 유지될 수는 없는 일이다. 건강한 아이를 키우는 나도 아이가 아플 때 두려움에 떨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활동보조인마저 퇴근한 한밤중에 민주가 아프기라도 하면 두 장애인 부부는 어떻게 할까.

누구든 장애를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때문에 장애인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장애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민주 같은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는 데 국가가 특별한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장애인 수는 200만 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재가장애인의 평균학력은 절반 이상이 초등학교 졸업이다. 학력 소외는 경제 소외로 이어져 많은 성인 장애인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나아가 차별과 편견으로 가득찬 세상인심은 장애인의 사랑도, 출산도, 자연스러운 감정과 기쁨으로 봐주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 당사자와 장애인 부모들이 성과 사랑에 대해서 어떤 억압과 두려움에 시달릴 것인지는 자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 부모를 둔 민주가 부모의 훈기를 받으며 커가는 지금의 상황은, 많은 장애인과 장애인 부모들의 조심스런 희망이 되고 있다.

장애 아들을 결혼시킬 생각을 안 했다는 엄마도, 초경을 시작한 장애딸을 안고 울었다는 엄마도, 이제 아들과 딸의 사랑을, 결혼을, 아이를, 희망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랄 수많은 민주는, 장애를 가진 가족이 아니라 국가가, 이웃이 키워야 하는 특별한 아이들인 것이다. 정책을 만드는 어느 누구도 주목해주지 않지만, 민주를 둘러싼 '희망의 프로젝트'는 '제도'와 '이웃의 사랑'을 축으로 이미 진행되고 있다.

장애를 가진 부모와 생이별하지 않는 프로젝트, 장애인도 건강하게 사랑을 나누고 그 결실을 기쁨으로 품을 수 있는 프로젝트, 장애인 부모를 가진 아이가 건강하게, 마음 다치지 않게 자랄 수 있는 프로젝트, 이 프로젝트가 진정 수백만 장애인 가족의 희망의 프로젝트가 될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고, 더 많은 이웃이 동참하기를 기대해본다.

최경화(경북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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