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던 전문직 여성 두 명이 입신출세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이야기가 연일 신문지상을 오르내리고 있다. 내실보다 화려한 외양의 브랜드를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어수룩한 틈을 파고들어 승승장구하다가 결국 스스로의 덫에 빠져버리고 만 서글픈 이야기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두 가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하나는 능력이나 실적보다는 간판과 외형, 배경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이고, 또 다른 하나는 거짓말과 짝퉁이 치르는 대가가 너무 가볍고 그러한 행위에 대해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너그러웠다는 점이다.
선진국에서는 사람이나 물건을 고를 때 거르는 체가 촘촘할 뿐더러 거짓말이나 가짜인 것으로 밝혀지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비록 사소한 거짓말이나 법 규정의 위반일 경우에도 그러할 뿐더러 직위의 높고 낮음을 묻지도 않는다.
우리의 경우는 거짓말이나 법규를 어긴 행위에 대해 대수롭잖게 여기거나 짐짓 눈감아 주는 사례가 적지 않다. 작은 거짓말에 죄의식을 가지지 않고 둔감해지면 마침내는 큰 양심을 저버리는 데도 눈이 멀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죄를 짓고 벌을 받아 신문 지면을 오르내린 사람이 어느새 화려하게 재기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모두가 우리 사회에서 불신의 싹을 키우고 신뢰기반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해 왔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신뢰는 한 나라의 복지와 경쟁력을 결정짓는 사회적 자본이라 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중요한 식량, 병기, 백성의 신뢰 중에서 부득이하게 버리지 않을 수 없을 때 무엇부터 버려야 할 것인가."라는 제자 자공(子貢)의 물음에 공자(孔子)는 "병기와 식량을 버릴 수는 있지만 신뢰를 저버리면 나라가 설 수 없다(無信不立)."라고 답했다. 사회적 자본인 신뢰가 있고 없고에 따라 사회통합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 효율성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회적 자본인 신뢰가 부족, 서로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서로의 행동을 감시하거나 때로는 소송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데 드는 정보탐색비용과 대리인비용(agency costs) 등 국민 모두가 떠안아야 할 사회적 비용 부담이 그만큼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뢰가 높은 사회에서는 이러한 비용을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 말 그대로 신용이 돈이 되고 경쟁력이 된다. 도로나 항만과 같이 눈에 보이는 사회적 자본은 정부가 나서서 건설할 수 있지만, 국민 모두의 의식과 관행의 소산인 신뢰는 깨어 있는 선진 시민정신과 건강한 사회기풍이 진작될 때만 비로소 만들어진다.
우리나라는 이제 신용사회에 깊숙히 들어와 있다. 국민 한 사람당 3.8장의 신용카드를 보유하고 있고, 전국 어디를 가나 상점과 식당에서 신용카드로 결제할 수 있다. 인터넷이용률이 세계 2위이고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은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다.
인터넷뱅킹과 모바일뱅킹을 포함한 전자금융 이용률이 76.3%에 달하며 10명 중 6, 7명은 집이나 사무실에서 온라인을 통해 주식을 매매하고 있다.
이처럼 신용과 관련된 인프라가 잘 발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다운 신용사회로 가는 길은 여전히 멀다. 개인신용불량자가 280만 명, 개인파산신청 건수가 12만 2천600명에 달하고 있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드는 우리나라가 국제투명성위원회가 발표하는 부패인지지수(CPI)가 163개 국가 중 42위, 뇌물공여지수(BPI)는 30개 국가 중 21위로 뒤처져 있다.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쌓아나가야 우리 경제의 체질이 튼튼해지고 대외경쟁력도 높아질 수 있다. 저신뢰 사회에서 고신뢰 사회로 하루빨리 나아가야 우리 뒤를 바싹 따라붙고 있는 중국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다.
대구경북 지역은 역사적으로 볼 때 믿음과 의리를 중히 여기고 이를 실천해온 전통을 지닌 고장이다. 정보화 사회와 글로벌경제를 맞아 신뢰가 지니는 무게는 한층 더 커지고 있다. 신뢰는 남을 배려하고 남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한편, 지역에 봉사하고 이웃과 함께 인정과 사랑을 나눌 때 한층 더 커질 수 있다.
조선은 5행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정치의 근본 강령으로 삼았으며 이를 수도 도성의 설계에 적용했다. 5행 중 인의예지를 4대 소문의 이름에 각각 붙였다.
그럼 5행 중 나머지 신(信)은 어디에다 두었을까? 바로 도성의 한가운데인 보신각(普信閣)이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믿음(信)을 가장 중심에 두었다는 역사적 증좌이다. 파루(罷漏)와 인정(人定)의 보신각 종소리는 장안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고 백성들에게 믿음(信)을 일깨우는 뜻이 담겨 있지는 않았을까. 새벽을 여는 보신각 종소리의 울림처럼 신뢰가 온누리에 두루 퍼져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화언 대구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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