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이 텃밭 일을 하다가 밭에서 미끄러졌다. 뾰족한 돌부리에 부딪혀서 손을 다쳤다. 병원에 가서 뼈에 금이 간 사실을 알고 깁스를 하고 손목을 고정해 놓았다. 하필이면 오른손이다.
다친 오른손 때문에 텃밭 일도 제대로 못하지, 날씨는 덥지, 씻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지, 푸성귀도 널어서 말리지 못하지 가끔 아주 또 가끔 화를 내셨다. 한번은 바지를 입고 나오셨는데 삐딱하게 옆으로 돌아가게 입고 나오셨다. 바로 돌려 드릴까 하다가 어머님이 민망하게 생각하실까봐 모르는 척했다.
화를 내실 때는 얼마나 불편하고 힘드시면 그럴까 이해가 되었지만, 역정을 내실 때는 어머님 불편한 손만큼이나 내 마음도 불편하고 힘들었다.
어머님은 새벽 일찍부터 텃밭에 나가서 푸성귀를 돌보셨다. 물이 모자라지 않는지, 거름이 적지는 않는지, 열매가 튼실하게 자랄 수 있는지, 호박이 줄기를 잘 뻗어가고 있는지 두루두루 살펴보셨다. 푸성귀를 애지중지 기르고 식물은 주인 발뒤꿈치 보고 자란다는 말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계셨다.
그런데 불편한 오른손 때문에 왼손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니 왼손은 심하게 그을리고 투박하고 거칠어지셨다. 그에 못지않게 얼굴도 검게 그을렸다.
노드리듯 쏟아지는 장맛비 덕분에 우리 집 거실은 빨간 고추에게 내주고 있다. 매운 냄새가 코끝을 싸하게 한다. 어머님이 빨간 고추를 따서 햇볕에 말려야 하는데 다친 오른손과 장맛비에 시기를 놓친 것이다. 빨간 고추가 갈 곳을 잃었다. 거실에 가져다 놓고 싶어 하셨지만 내 눈치를 보고 계신다. 매운 냄새를 싫어하고 거실에서 활동할 수 있는 동선이 짧아진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뾰족해져 있다. 남편이 거실에서 말리라는 말 한마디에 대답이라 여기고 빨간 고추가 의기양양하게 거실을 점령하고 있다. 선풍기 틀어주고 가스보일러 틀어놓고 빨간 고추가 호사를 누리고 있다.
어머님이 손을 다친 이후로 식탁 위의 반찬이 한 가지 두 가지 줄었다. 푸성귀를 좋아하던 식구들도 텃밭에 나가기는 싫고 먹고는 싶고 다들 젓가락을 입에 물고 있다.
어머님이 "부추가 많이 자라서 베어야 하는데." 하셨다.
저녁에 텃밭에 나가시는 어머님을 따라 나섰다. 낫을 들고 갔다. 낫질이 서툴고 어색했지만 부추를 쓱쓱 베어서 한 소쿠리 담아 왔다. 부추김치를 담아서 식구들이 맛있게 먹었다.
손이 안 아프시면 고추도 따오시고 호박도 가져다주시고 부추도 베어다 주셨는데 텃밭에 많은 푸성귀가 있어도 따다가 먹지 않는다고 언짢아 하셨다.
나는 '어머님이 가져다주시겠지' 미더운 생각을 했다.
어느 날, 볼일을 보고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님이 깁스를 풀었다. 아직은 약간 불편해 보였지만 텃밭일 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콩, 땅콩, 가지, 호박, 고구마 등등을 수확해 오셨다. 상치, 부추, 열무도 밥상에 올라왔다. 어머님이 깁스를 하고 있는 동안, 지루하게 내리는 장맛비 만큼이나 우울하게 생각하셨다. 손에 날개를 다신 것 같았다. 토란대도 베어서 마당에 널어 말리고 둥근 박을 따다가 채로 썰어서 햇볕에 말리고 있다.
오른손이 불편해서 양손으로 할 수 없었던 모든 일을 여한 없이 다 하시는 것 같았다. 마당에 널려있는 곡식과 푸성귀들은 어머님의 양손이 움직일 수 있는 걸 축하라도 해주는 듯 사이좋게 햇볕 바라기를 하고 있다.
식구들을 위해서 밥상에 싱싱한 푸성귀를 올려주신 어머님이 감사할 뿐이다.
어머님이 건강하신 게 우리 집 최고의 밥상이다.
지미영 / 구미시 봉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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