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산과 삶] 두 번째 -'아이거북벽'/정광식 지음

정광식은 뉴욕의 직장에서 팩스를 받는다. 대학산악연맹 친구들의 사망소식이다. 이들은 아이거북벽 산행 중 낙뢰에 맞아 숨졌다. 그는 멍한 상태로 회사 일을 마친다. 그리고 밤새도록 술을 마신다. 꺼이꺼이 운다.

1년 뒤 1982년 아이거북벽으로 향한다. 휴가를 냈지만 책상은 깨끗하게 정리했다. 동료들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 1년 동안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철봉에 매달려 왔다. '정광술'이라고 불릴 만큼 주당이었던 그가 술도 끊었다.아이거에 빼앗긴 두 친구를 위해 아이거를 정복할 준비를 해왔다.

"이제 그 날이 왔다. 내가 그들과 같이 되든, 아니면 살아서 돌아오든, 둘 중의 하나일 운명의 길을 향해 이제 떠나고 있는 것이다."

아이거북벽은 어떤 곳인가? 세계에서 등정하기 힘든 세 곳 중 하나다. 해발고도 3,970미터. 높지 않지만 등반가들은 주저한다. 가늠하기 힘들만큼 변덕스러운 날씨. 깎아지른 듯한 경사는 두려움 그 자체다. "클라이머는 아이거북벽을 오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는 정의가 생길 정도다. 50명이 넘는 등반가가 이곳에서 숨졌다.

정광식 일행의 아이거북벽 등정은 4박5일간의 혈투다. "단단히 얼어붙어 있던 부스러지기 쉬운 돌들은, 마침내 그들의 자리를 이탈하여 미치 폭격기가 폭탄을 퍼붓듯이 북벽의 모든 부분이 떨어지기 시작한다.……눈사태는 쉬지 않고 그들을 휩쓸어버릴 듯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번쩍이는 벼락은 그들 몸을 바위에서 떨어지지 않게 확보하는 하켄을 때려서 녹여버리기도 한다."

사투 끝에 정상에 올랐다. 그런데 담담하다.

"드디어 정상에 섰다. 참으로 오랜 싸움이었다. 우리는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다가 그저 손을 잡았다. 아무런 희열도 행복감도 없었다. 단지 사랑하는 저 두 명의 친구를 위해 내일 당장 죽더라도 여한이 없으리라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정(情) 밖에는……구태여 복수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지 그들을 대신해 그들의 뜻대로 우리는 올랐을 뿐이다."

'아이거북벽'은 한국의 산악인, 산악문학인이 뽑은 최고 산악문학이다. 월간 '사람과 산' 설문조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1989년 초판 된 후 지금까지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험난한 산을 등정하는 과정을 담았지만 친근하다. 이 산에 미친 자들의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는 소소한 재미를 준다. 이들은 장비짐만 보면 마냥 행복해 한다. 그러다가도 산이 주는 위압감에 공포를 느낀다. 오랫동안 끊어온 술과 담배를 찾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아이거북벽에 담긴 여러 일화도 적절하게 소개한다. 이를테면 '신들의 트래비스'를 지나갈 때 스테파노 롱히를 떠올린다. 스테파노 롱히는 자일에 묶인 채로 동사한 인물이다. 그는 2년 동안 그 상태로 매달려 있었다.

부록은 친절하다. 정광식과 일행이 등정에 사용했던 물품, 등반로, 심지어 옷차림까지 세세하게 알려준다. 아이거북벽에서 숨진이들의 명단과 사망과정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런 친근감과 친절함이 책의 흡입력을 높여준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하게 사로잡는 매력은 역시 끈끈한 산 사나이의 우정이다.

친구가 숨진 그 곳을, 친구를 위해, 친구들과 함께 오른다. 죽음의 길이 될 지도 모르지만 함께 간다. 이 사람들에게는 결코 놓을 수 없는 끈이 있다. 그 끈은 서로의 목숨을 묶은 자일과도 같다.

산 사람들의 우정은 때론 무모하게 보인다. 그러나 동경의 대상이 된다.

그 동지애를 담은 또 다른 책이 있다. 거벽등반가 박정헌과 최강식의 실화를 쓴 '끈'이라는 책이다. 촐라봉 등정 후 하산길, 영하 15도의 살인적인 추위 속에 놓인 두 사람. 호흡하기도 곤란하다. 후배 최강식은 다리가 부러진다. "살아서 돌아가자." 후배를 부축한다. 설상가상, 후배가 빙하 틈새로 떨어진다. 25미터 깊이로 추락한 후배. 자일로 연결된 박정헌의 몸이 끌려간다. 다행히 멈췄지만 갈비뼈 두개가 부러졌다. 잔인한 선택의 순간, 자일을 끊고 혼자 살 것인가? 아니면 그와 함께 할 것인가? 박정헌은 후배와 연결된 자일을 움켜쥔다. 부상의 몸으로 후배를 끌어올린다. 두 팔의 힘만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하루 반의 사투 끝에 구조된다. 그러나 우정의 대가로 박정헌은 손가락 8개, 최강식은 손가락 발가락 대부분을 절단했다.

박정헌은 자일을 끊을 수도 있었다. 자신의 생존에 위협을 주는 후배,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비루한 인간의 본성에 타협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았던 자일. 그것은 산을 매개로 맺어진, 놓아버릴 수 없는 우정의 '끈'이다.

◇정광식은

1956년생. 아이거북벽 등정 후 바룬체히말 북서벽(1984년) 에베레스트 남서벽(1991년) 등정 현재 홍콩에서 사업 운영.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 번역.

◇아이거북벽

중부 알프스의 베르너 오버란트 산군에 속하는 봉우리. 정상표고 3,970미터. 수직높이 약 1,800미터. 경사도 65~80도. 석회암 하향 단층의 암질로 이루어짐.

전은희(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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