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차 한잔의 단상] 김장

김 모락모락 나는 햅쌀밥에 갓 담근 김장김치를 길게 찢어 얹고 한입에 쏙~, 그 군침 도는 맛이 그립습니다. 유독 노란 배추 속만을 좋아하는 아이는 김장하는 어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습니다. "엄마, 하나만" 양념 묻어 벌겋게 된 손으로 배추를 이리저리 뒤척이는 어머니, 작고 노란 속잎을 찾아 양념을 훑고는 아이 입에 쿡 쑤셔 넣습니다. 제비새끼 먹이 받아먹듯 날름날름하던 아이의 입도 어느덧 양념이 묻어 통실한 햇김치가 됩니다. "저리가라 맵다"

김장김치는 마약입니다. 강한 중독성을 가집니다. 가게마다 가공김치가 넘쳐나 입맛대로 골라먹을 수 있는 세상인데도 여전히 김치냉장고가 최고의 인기상품입니다. 그것은 어머니 손 맛 때문입니다. 백 집이면 백 집 김치 맛이 다른 것은 재료와 방법의 차이 뿐만은 아닙니다. 정성과 체온, 그리고 김장수다를 통해 가미된 적절한 염도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머니 맛인 것입니다.

어느 날 중국 친구가 김치를 만들었다고 자랑합니다. TV에서 김치 담그는 방법을 보고 그대로 따라했다고 합니다. 무의 크기까지 정확하게 잘랐고, 양념한가지도 빠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소금에 배추를 절이고 양념을 만들어 섞고 비벼낸 과정까지 소상히 설명합니다. 맛있어 보인다는 말에 한마디 덧붙입니다. "이 김치는 중국김치다. 우리 조선족중국인이 만든 김치거든" 젓가락으로 한 점 집어 입에 넣어 봅니다. 배추절임을 두고 발효공학을 강연하는 것은 소귀에 경 읽는 격이나 마찬가지여서 씩~ 미소 한 자락 보냅니다.

올해는 배추 값이 비싸 김치가 금치가 될 거라고 야단입니다. 돌이켜보면 꼭 몇 년에 한번 씩은 김치파동이 있습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배추, 무, 양념값 때문에 쌈짓돈을 털어야 한다고 투덜댑니다만 김장생각하는 마음은 즐거움입니다. 비싼 김장값에 인심 박해질까 두려워하는 이도 있는데 기우입니다. 귀할수록 더 나누는 것이 우리네 김치 인심, 올해도 집집마다 김치냉장고에서 동네김치들의 맛 자랑이 벌어질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한 허리를 베어내고도 또 한밤이 남는 겨울밤, 삼삼오오 짝을 지은 또래들이 사랑방에 모여 밤새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밤 깊어 이야기 길어지면 출출함에 인사불성, 시원한 김치와 따끈한 라면국물을 향한 집념이 김치도둑을 만듭니다. '훔친 것이 더 맛있다' 만고의 진리입니다. 선출된 특공대에 의해 저질러진 완전범죄는 길게 여운을 남긴 김치 국물 때문에 덜미가 잡히곤 합니다. "솥에 식은 밥도 있는데 기척이나 할 것이지...." '네 집 아이', '내 집 아이' 대신에 '우리 아이'들만 있는 시큼한 김장인정에 한겨울이 훈훈합니다.

이정태(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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