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1운동은 우리 민족 끈기 보여준 쾌거"

항일운동 닮은꼴 인생 장병하·권중혁 옹

▲독립운동가 권중혁(왼쪽)·장병하 옹이 28일 만나 3·1절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독립운동가 권중혁(왼쪽)·장병하 옹이 28일 만나 3·1절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우리 민족이 겪었던 아픔이 점점 잊혀가는 게 안타까워. 이날의 정신을 잘 새겨 줬으면 좋겠어."

3·1절을 앞둔 지난 28일 피끓는 젊음을 항일 운동에 쏟은 장병하(82·대구 달서구 대곡동) 옹과 권중혁(88·달서구 진천동)옹을 만났다. 두 사람은 일제의 발악이 극에 달하던 1944년 항일비밀결사에 참가했다 옥고를 치렀다. 어린 시절부터 전해들은 3·1운동 의거는 두 젊은이의 가슴속에 항일이라는 불꽃을 피웠다.

"해마다 돌아오는 3·1절이면 둘이 만나서 옛날 얘기를 해. 3·1운동은 정말 우리 민족의 저력과 끈기를 보여준 쾌거였지." 두 사람은 '고등계 형사' '형무소' '징용' 등 이제는 역사책에나 나올 법한 단어들을 자연스럽게 나열하며 60여년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둘의 인생은 많이 닮았다. 1944년 장옹은 당시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비밀결사 '조선회복연구단'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렀다. "정확히 3월 10일 거사를 준비했어." 조선회복연구단은 일본육군창립기념일인 3월 10일에 맞춰 학교와 경찰서 무기고를 털어 무력 봉기에 나설 계획을 세웠다.

강제징집된 군인 신분이었던 권옹은 부대내 동지와 6인회를 결성, 일본에 맞설 계획이었다. "우리는 부대를 탈영해 팔공산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할 생각이었지." 동지들은 모두 사망했고 이제 그는 6인회의 마지막 생존자다. 하지만 이들의 거사는 안타깝게도 불발에 그쳤다. 둘 다 주민들의 밀고로 잡혀 지독한 고문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구에서 수형생활하던 장옹과 일본 후쿠오카에서 수형생활을 하던 권옹에게 해방은 조용히 찾아 왔다. 해방 후 이들의 인생행로는 비슷했다. 두 사람 모두 대구의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교육만이 민족의 힘을 키울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다.

"민족이 힘이 없어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으니 교육을 통해 힘을 길러야 된다고 생각했지…." 해방이 된 지 반세기가 훌쩍 넘어 두옹의 머리엔 하얀 서리가 내린 지 오래지만 일본 종국위안부, 독도 문제 등 아직 항일 운동이 두옹에겐 과거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었다.

임상준기자 zzuny@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