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 박범신 신작 소설 '촐라체'

'모든 건 스쳐가는 것'아니다 스스로 '로프'를 끊지 마라

아버지가 다른 두 형제와 또 한사람의 관찰자가 히말라야 '죽음의 봉우리' 촐라체(6,440m)에 오른다. 장비도 거의 없이 오르는 모습은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세사람은 저마다 사정이 있다. 형 박상민은 사업에 실패하고 동업자의 농간으로 사기죄에 걸려 감옥에 다녀왔으며 아내와 이혼한 상태다. 그는 어디에도 기댈 수 없고, 무엇도 할 수 없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동생 하영교는 죽은 아버지의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는 남자를 칼로 찌르고 도망쳤다. 또 한사람의 관찰자인 '나'는 군대시절 짧게 사귄 여자로부터 '당신 아기예요'라는 말과 함께 핏덩이를 받아 안았고 그 아이는 열 몇살이 되자 스님이 되겠다고 떠났다.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다.

세사람 모두 세상과 불화하고 있다. 그 원인은 세상 탓이 아니다. 그들 자신의 잘못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순간에 충실하며 걸었고 걷다 보니 험한 세상과 마주 섰다. 세사람이 서울에 머문다고 할지라도 이들 앞에 놓인 미래는 '촐라체'의 깎아지른 빙벽과 다르지 않다.

이들이 장비도 거의 없이 촐라체에 오르는 것은 '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다. 그들은 살고 싶어서 '죽음을 요구'하는 촐라체 빙벽에 매달려 있다. 두 형제가 촐라체 빙벽을 오르면서 '그럼…. 실례합니다' '그러지 말고…좀 넘어갑시다' 라고 말하는 것은 촐라체를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협조를 구할 '상대'로 보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들이 이 '죽음의 산'을 장비도 거의 없이 찾은 것은 '정복'이 아니라 '이해와 협조' 속에 살고 싶다는 말이다.

죽음의 빙벽 촐라체 역시 이들을 밀쳐내려고 으르렁거리지만 피켈 찍을 자리를 내주고, 잠잘 공간을 마련해준다. 박상민이 잠깐 추락하지만 다친 곳이 없다는 사실은 촐라체가 이들을 완전히 밀쳐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제 소설의 주인공은 넷이다. 세사람과 히말라야의 촐라체가 각자의 입장에서 마주 서는 것이다.

촐라체 정상에 오르고 하산하던 길에서 박상민의 동생 하영교가 크레바스에 추락한다. 떨어지면서 하영교는 발목이 부러진다. 스스로 기어올라올 수 없다는 말이다. 굶주리고 지친 박상민은 몸무게가 10㎏ 이상 무거운 동생 하영교를 끌어올릴 수 없다. 설령 크레바스에서 하영교를 구해낸다고 해도 죽음이 기다릴 뿐이다. 발목이 부러진 상태로 하산은 불가능하다. 굶어죽거나 얼어죽을 뿐이다. 벌써 이틀째 물 한모금 마시지 못했다. 선택은 없다. 두사람은 이미 약속했다.

'한사람이 크레바스에 빠지고 구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지체 없이 (둘을 묶고 있던) 로프를 자른다.'

이는 두사람만의 약속은 아니다. 히말라야를 오르는 모든 사람의 약속이고 생존을 위한 규칙이다. 더불어 이 약속은 히말라야에 한정된 게 아니라 세상의 약속이다. 구할 수 없는 상대를 구하기 위해 또 다른 희생을 치를 수는 없다. 로프를 자르지 않는 것은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패배를 확인하고 강화하는 행위일 뿐이다.

로프를 자를 것인가, 말 것인가…. 박상민은 짧게 고민한다.

'영원히 머무는 인연은 없다. 모두 스쳐 지나는 것이다. 어머니가 떠나고 아버지가 떠나고, 영교의 아버지도 기어코 떠났다. 함께 떠난 것이 아니라 스쳐 지나듯 결국은 따로따로 떠나지 않았던가.'

'다 스쳐 지나는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상민은 칼을 꺼낸다. 팽팽하게 당겨진 로프는 칼을 대기만 하면 끊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박상민은 외친다.

"당신 말은 틀렸어."

사랑조차 스쳐 지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굴복하고 싶지 않다. 스쳐 지나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지옥으로 함께 갈망정, 붙잡아서, 머물 수 있을 때까지, 상처를 나누어 곪아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함께, 있겠다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박상민은 로프를 자르지 않았으나 로프는 닳아 끊어지고 만다. 하영교는 크레바스 바닥으로 추락한다. 그러나 죽지 않는다. 크레바스가 깊지 않았던 것이다. 박상민이 로프를 잘라 하영교의 목숨을 버리지 않았듯 촐라체 역시 하영교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박상민과 촐라체는 '규칙'과 '관성'과 자신의 '삶'을 버리고 하영교의 목숨을 구했다. 박상민은 목숨을 버려 동생을 구했고, 촐라체는 명예를 버리고 하영교를 구한 것이다.

소설 '촐라체'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 박상민, 하영교가 히말라야 죽음의 봉우리 '촐라체' 북벽에서 보낸 6박 7일의 이야기다. 장비에 의존하지 않는 간편한 등정과 조난, 기적 같은 생환을 그린 것이다.

이 짧은 줄거리를 파악했다고 '촐라체'를 읽었다고 생각하면 좋은 독서가 아니다. 모든 문학작품이 그렇지만, 촐라체는 줄거리 외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촐라체 등정과 조난, 기적 같은 생환은 길 떠나기, 즉 인생의 제유에 불과하다. 배경이 된 촐라체는 히말라야의 6,440m 봉우리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이 봉우리를 오르고 내려오는 동안 지옥 같은 상황에 직면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산악소설'이 아니다. 촐라체가 숨긴 수많은 함정과 덫은 세상의 함정과 덫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등장인물들이 산에서 나누는 대화와 회상에 무게를 두는 편이 더 나은 읽기일 것이다.

소설 '촐라체'를 어떤 이야기라고 잘라 말하기 어렵다. 역설적이게도 책을 세심하게 읽었기 때문에 그렇다. 작가 박범신은 이렇게 말했다.

작가는 '소망대로 잘 완성됐는지 단정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작가다. 그러나 읽는 사람은 독자다. 쓰기와 읽기가 모두 충실할 때 소설의 완성도는 높아진다. 소설 '촐라체'는 박범신의 손을 떠났다. 이제 완성도는 독자에게 달렸다.

소설 '촐라체'는 관성과 질서를 따르는 대신 야성의 모럴을 따르자고 말한다. 그것이 결국 죽음일지라도 포기하거나 꿈을 버리지 말자고 말하고 있다. 5㎜ 로프에 의지해 촐라체를 오르는 행위 그 자체가 이미 관성과 규칙에서 벗어나 삶과 야성을 향한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로프를 끊지 않는 것, 이 역시 질서를 벗어난 야성이다. 이 가느다란 로프는 신뢰와 생명의 끈이며 동시에 야성과 꿈이다. 작가는 스스로 로프를 끊지 않는 한 '로프'는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364쪽, 9천8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 소설 '촐라체'의 특징

▶'촐라체'는 작가 박범신이 2007년 여름부터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연재했던 소설이다. 신문연재 소설로 남다른 인기를 끌었던 작가가 중년의 나이에 클래식 소설로 인터넷 연재를 시작한 것이다. 신문연재와 달리 인터넷 연재는 실시간 댓글이 올라온다. '악플'도 있었다. 그러나 박범신은 끝까지 자신의 글쓰기 방식을 유지했다고 밝히고 있다. 조회수가 금방 나타나는 인터넷 연재였지만 박범신은 충격적 장면이나 독자의 눈을 끌 만한 수식을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클래식한 방식을 우직하게 밀고 나갔다.

▶이 소설엔 아버지가 다른 두 형제가 등장한다. 두 형제는 어머니를 빼앗긴, 혹은 독점하지 못한 '상실감'으로 으르렁댄다.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가 다른 형제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문학에서 좀처럼 주목받지 않았던 가족형태다. 가느다란 로프에 서로의 목숨을 붙들고 맡긴 두 형제의 여정은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새로운 사랑' 형태를 모색했던 작가의 전작 '나마스테'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

▶소설 배경이 촐라체인 만큼 전문 산악용어가 많이 등장한다. 박상민 하영교 두 형제가 서로를 묶고 다녔던 로프는 안자일렌(Anseilen)으로 '여럿이 등반할 때 추락 위험을 줄이기 위해 로프로 서로를 묶어 연결하는 것'을 말한다. 이 외에도 다양한 산악용어와 겨울 히말라야의 고독과 혹독함, 견딜 수 없는 추위를 느낄 수 있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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