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진행된 토론 수업. 교사는 '인간의 폭력성은 본능인가, 학습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5, 6명씩 6개조로 나뉜 학생들 중 절반은 '본능론'을 주장했고, 나머지는 '학습론'을 강변했다. 처음에는 제법 논리적인 주장들이 오고 갔지만 갈수록 논점은 흐려졌고, 말꼬리 잡기가 시작됐다. "동물조차 동족을 무참히 살해하지 않는다"는 본능론쪽 주장에 대해 학습론쪽은 엉뚱하게 "햄스터도 서로 물어죽인다"고 응수했고, 논리적 궁지에 몰린 학습론쪽은 "너희들도 근본부터 폭력적이고 잔인하다는 말인가?"라며 비난을 시작했다.
중학교 교사인 류모(36)씨는 "촛불시위 이후 학생들 사이에서도 토론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나 토론 수업을 하다 보면 상대방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무조건 내가 옳다'는 막무가내식 주장을 펴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토론 전문가들은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설득의 '토론'(debate)과 합의 및 결론을 끌어내는 '토의'(discussion)를 구분하지 못한 탓이라고 분석한다. 직장인 김현수(34)씨는 "신규 사업 아이템 토론을 하자면서 당초 상사가 낸 의견과 다른 이야기를 하면 '도대체 뭘 하자는거냐?'며 면박이 날아온다"고 했다. '브레인 스토밍'(brain storming)도 다양한 의견을 듣기 위한 일종의 토론. 하지만 상대 의견에 대한 비판 금지가 전제조건이지만 특히 직장에서는 '그게 되겠냐?'는 비아냥거림이 난무하기 일쑤다. 한마디로 토론은 없고 주장만 난무한다.
송원학원 윤일현 진학지도실장은 토론 문화가 없는 이유를 "아직 근절하지 못한 권위주의,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실적주의, 일방적 전달에 매몰된 입시위주 교육 등 3가지"라고 지적했다. 특히 토론에서조차 승패를 가리려는, 즉 '나는 되고, 너는 안된다'는 식의 강박관념이 있다는 것. 이같은 토론 능력의 한계는 인터넷에서도 드러난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 토론방에는 "이미 (아고라는) 토론의 장이 아니다. MB 반대에 대한 반대의 글이 올라오면 무조건 알바라고 몰아세운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한 네티즌은 "다양한 의견과 근거가 제시되고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레 건강한 토론이 이뤄져야 하는데, 우리 편이 아니면 안된다는 식의 토론이 판을 친다"고 비판했다. 다른 네티즌은 "인터넷이 촛불 시위와 국민대토론회를 통해 그간 무관심했던 대중들을 토론의 광장으로 이끌어낸 긍정적 측면이 있는 동시에 그 광장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면 마녀사냥식 뭇매를 때리는 우려스런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고교생 배성욱(18)군은 "주류와 다른 주장의 댓글을 달면 비판이 쏟아진다"며 "물론 관심을 끌기 위해서 터무니없는 댓글을 달거나 억지 주장을 펴는 경우도 있지만 왜 혼자서 '노'(No)라고 외치는지 귀 기울이는 자세도 아쉽다"고 지적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1. 2분 말하고 8분 들어라=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요?', '아~'라며 추임새를 넣어주는 것도 좋다.
2. 상대의 자존심을 살려줘라=욕해봐야 당장 시원하지만 결국 자신에게도 돌아온다.
3. 실수를 인정하라=자신의 논지가 틀렸다면 깔끔하게 승복하라. 그렇다고 지는 게 아니다.
4. 철저하게 준비하라=반론에 대한 재반론까지 준비하라. 근거없는 주장은 잔고없는 통장이다.
5. 결론을 재촉하지 마라=반찬 다 펼쳐놓기도 전에 공기밥 비우는 꼴. 느긋할수록 유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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