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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詩·그림을 만나다] 여고괴담(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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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코지의 공포소설 '링'은 염력을 다루고 있다.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비디오테이프에 녹아들어 사람을 죽인다. 유기체처럼 스멀스멀 기어드는 알 수 없는 힘이 TV에서 산발한 채 살아나는 장면은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끔찍했다.

그 염력은 한(恨)의 결정체다.

동양 공포영화의 정수가 바로 한이다. '링'은 억울하게 죽은 며느리의 한이 고양이에 투영돼 복수하는 한국식 공포의 현대식 변주다.

한은 풀리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딘가에 숨어 약한 틈을 노리고 있다. 다시 부활하기를 기다리며 사람들의 입김과 손길이 닿는 아주 가까운 곳에 웅크리고 있다 비등점에 다다르는 순간, 가공할 모습을 드러낸다.

'여고 괴담'도 대표적인 한의 공포영화다.

여고는 한이 숙성되기 좋은 저장고다. 숱한 괴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교실에, 화장실에, 복도에 도사리고 있다. 유린당하고 억압받고, 결국 피어 보지도 못한 채 떨어질 때 거기엔 꽃잎 대신 괴담이 피어난다.

치마를 입은 하얀 맨발이 물웅덩이를 밟고 지나간다. 카메라가 고개를 들면 거기에 스산하게 서있는 학교 건물이 나타난다.

'늙은 여우'라는 별명의 여교사. 악독한 그녀는 끔찍한 시체로 발견된다. 그녀는 죽기 전 의문의 말을 남긴다. "진주가 학교에 있다." 진주는 9년 전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해 결국 죽은 여학생이다.

하얀 교복을 입고, 재잘대는 아이들 속에 진주가 있다. 도대체 누가 진주일까.

'여고 괴담'은 귀신 이야기를 전면에 배치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대입 지상주의에 찌든 교육현실을 비롯해 교사의 편애와 체벌 등을 고발하는 사회의식이 배어있다. 악독교사가 아이들의 가슴을 쿡쿡 찌르고, 귓불을 만지는 등 성적 희롱 장면도 많아 교총 등 단체로부터 상영 중지 항의를 받기도 했다.

친구까지 팔아야 하는 입시지옥, 질투와 편애, 체벌과 왕따 등 여고 특유의 내밀한 억압들이 원한으로 커간다는 점에서 모든 아이들이 진주일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고 괴담'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것이 복도다.

영어제목도 'Whispering Corridors'이다. 귀신의 목소리가 속삭이는 복도다. 원근감이 뚜렷한 구도의 복도 끝. 교복 입은 아이가 카메라를 향해 달려오는 장면은 이 영화의 대표적인 공포 장면이다.

'여고 괴담'은 여고생활을 겪은 여류 작가가 작업했다. 화가 장숙경은 복도에 초점을 맞추었다.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듯 스산한 한밤의 복도를 푸른 톤으로 그렸다. 작가는 "문득 학교 복도는 항상 공기가 차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달빛이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복도가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진다. 캔버스에 흘러내리는 피도 푸른 피다. 끝없이 이어진 죽음의 피, 월경의 피, 억압의 피들이다.

시인 이규리는 '늙은 여우'와 '미친 개'의 죽음을 낭자하게 표현하며, 교정에서 벌어지는 '입시와 경쟁' '질투와 편애' '비교와 체벌'을 꽃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꿈 많은 청춘의 꽃들은 어느 날부터 향기도 사라지고, 색깔도 검게 변했다. 열등을 부추기는 피투성이들로 인해 받은 상처들이다.

진주가 당한 왕따와 슬픔의 극단을 '점쟁이의 딸이니 같이 놀지 말라고…… 같이 놀지 말라고……'라고 강조했다.

가장 공포스러운 것이 첫 행이다. '3-3반 교실, 숨소리가 하나 더 있다'.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슬픈 유령의 존재를 속삭이는 듯한 숨소리로 그려냈다.

'그냥 하고 싶은 일이 많았을 뿐인데, 그냥 친구를 기다리고 사랑을 기다렸을 뿐인데,'

복도에 녹아든 진주의 목소리는 그 어느 귀신보다 슬프고 처연하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여고괴담(1998)

감독:박기형

출연:이미연, 김규리

러닝타임:107분

줄거리:여고 교사인 박기숙(이용녀)은 자신의 옛 제자이자 현재의 동료 교사인 은영(이미연)에게 '9년 전에 죽었던 진주가 계속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불가사의한 말을 남기고 비명횡사한다. 10년 전 무당의 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따돌림당했던 진주는 은영과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으나 박기숙 선생의 강요로 절교해야만 했었다. 결국 진주는 아이들의 장난으로 미술실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한편 등굣길에 박 선생의 끔찍한 사체를 목격한 지오는 박 선생의 죽음을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라는 학교 측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죽는 박 선생의 모습을 스케치북에 그렸다가 무지막지한 구타를 당한다. 박 선생의 유언을 염두에 두고 있던 은영은 이런 지오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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