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쇼와 정치사이

한 시행사가 대구 중구 남산동에 지난 2005년도부터 추진해온 주상복합아파트단지에는 건물잔해와 쓰레기더미가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다.

시행사는 2005년도에 1만6천㎡ 부지 매입을 끝내고 교통영향 평가까지 끝낸 뒤 지난해 건축 심의를 마쳤다. 단지 내에 1만2천㎡ 규모의 할인 매장을 넣는 조건으로 인·허가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대구시가 사업 필증 교부를 거부해 사업이 중단됐다.

조해녕 전임 대구시장 때 대형마트가 입점한다는 전제하에 교통영향평가를 통과했고, 사업승인도 신청했다. 또 김범일 대구시장 재임 때인 2006년 9월에는 대형마트가 들어선다는 사업계획으로 건축심의도 조건부 통과됐다. 건축심의 조건부 통과는 사실상 사업허가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금융기관은 시행사에 자금을 지원했다. 이미 투입된 자금만 800여억원에 이른다.

시행사는 지난해 11월 조건부 통과 사항을 모두 완료하고 대구시에 사업승인을 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대구시는 4차순환선 내에 대형마트 신규진입을 억제하는 게 대구시 방침이라며 대형마트를 일반 판매시설로 바꿀 것을 요구하며 사업승인을 내주지 않고 있다.

시행사 측은 "시가 처음부터 현재의 방침과 같은 일관된 입장을 밝혔으면 사업방향을 바꿨을 것이다. 이런 마당에 어느 기업이 대구시를 신뢰하고 투자를 하려 하겠느냐"고 항변하고 있다.

대구시의 실무진에서도 행정절차상 사업필증을 교부하지 않을 수 없다는 보고를 김 시장에게 수차례 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무진들은 행정소송은 물론 민사소송까지 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김 시장에게 씨알도 안 먹히는 분위기다. 법적인 쟁송이 예견되고 실무진에서 수차례 사업필증 교부를 보고했는데도 김 시장은 왜 자신이 건축심의를 해준 사업을 막고 있을까?

지난 5월 국회가 대구경북과학기술연구원(DGIST)에 교육기능을 갖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김 시장은 예상 밖으로 2010년 이후부터 천천히 준비·시작하라는 주문을 하고 있다. 김 시장의 요구대로 한다면 5년 뒤에나 교육기능을 할 수 있게 된다. 반면 DGIST 건물 착공만은 빨리 하라고 닦달을 하고 있다.

관계자들은 김 시장의 이런 태도는 지역 내 대학들의 반발을 우려한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대구경북 내에서 100여명 이상이 광주과기원으로 진학하는 실정이다. 특히 울산과학기술대가 내년부터 500명씩 선발할 예정이어서 인재유출은 더 심화될 것이다.

일정부분 지역 대학과의 경쟁이 있겠지만 DGIST가 교육기능을 가져야 하는 것은 세계적인 석학들을 초빙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이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기존 국책연구원처럼 1천명 이상의 연구원을 확보할 수 없어 학부생 및 석·박사를 연구원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DGIST가 학생들을 모집하더라도 과정마다 각각 200명 이내의 최소 규모로 지역 내 대학들과의 과당경쟁을 피하고 또 대학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시설과 프로그램을 만들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김 시장이 먼저 나서 지역 대학들을 설득하고 협조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

'역사의 종말'을 저술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신뢰'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라고 했다. 사회나 시장에서 신뢰가 형성되어야 거래비용과 분쟁이 줄어들어 저비용-고효율 경제가 가능해진다는 논리다.

김 시장의 이 같은 리더십과 판단력은 '신뢰의 위기'를 넘어 '대구의 위기'로 이어질 위험성이 크다.

이춘수 경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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