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고종시대의 리더십

오인환 지음/열린 책들 펴냄

어째서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했고 일본은 성공했을까. 조선은 왜 총 한방 쏘아보지 못하고 나라를 빼앗겼나? 이 책 '고종시대의 리더십'은 한국 근세를 넓게 보아 '고종시대'로 규정하고, '위기관리능력'의 관점에서 조선의 실패와 일본의 성공을 분석, 비교하고 있다.

물론 '위기관리'라는 문제 외에도 당시 조선의 실패와 일본의 성공에는 외부 환경적 여건, 문(文)과 무(武)의 문화적 차이, 지리적 여건, 산업화 수준, 시민의식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이 책은 '위기관리'라는 관점에 집중해 100년전 조선과 일본, 청국을 들여다보며 현재를 묻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더불어 한국인에게 가장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그는 조슈 번(지금의 야마구치 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하급 무사보다 지위가 낮은 주겐(中門)신분의 사람에게 양자로 들어갔기에 이토 히로부미도 무사들 뒷바라지를 하며 성장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매사에 목숨을 건 정면승부를 펼쳤다. 비천한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가 최고 대신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정면승부를 펼쳤고, 그 승부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말년에 이토 히로부미는 해외 유학길에 오르는 아들에게 이렇게 조언한 바 있다.

'천하의 일을 추진하노라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경우가 생긴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너도 네 뜻을 이루려면 죽음을 각오하라. 다른 사람의 힘에 의존하지 말고 자력으로 해라.'

이토 히로부미의 이 말은 그의 막내아들뿐만 아니라 조선의 고종에게도 적당한 조언이 될 듯하다. 자기 나라를 빼앗긴 고종과 남의 나라를 집어삼킨 이토 히로부미가 나눈 대화는 두 사람이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잘 보여준다.

고종은 일본이 그럴듯한 명분만 내놓고 늘 강압적으로 일을 처리한다면서 불만을 제기했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는 '폐하는 불만을 말씀하시지만, 제가 한번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대한제국은 어떻게 오늘날까지 생존할 수 있었습니까? 또 대한제국의 독립은 어떻게 보장되었습니까? 폐하는 그러한 사정을 알면서도 불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동학란과 같은 천하대란이 일어날 경우, 폐하는 그 책임을 한 몸에 질 각오가 돼 있습니까'라고 반문하고 협박했다.

어떤 면에서 고종은 난세에 어울리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위기가 닥쳤을 때 정면돌파 대신 간접 해결방식을 선호했다. 측면돌파나 회피, 책임전가, 이이제이 등이 그가 택한 방식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사생결단으로 정면돌파하고 남의 힘에 의존하지 않는 면과 다른 점이다.

그렇다고 이토 히로부미가 시종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유형의 인물은 아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졌고, 일단 결단하면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는 안 되는 일을 빨리 포기할 줄도 알았다. 무엇보다 세계정세를 읽는 눈이 밝았고, 앞날을 내다보는 상상력이 청나라 이홍장이나 조선의 대원군, 김옥균보다 뛰어났다고 평가받는다.

김옥균의 '갑신정변 실패'와 이토 히로부미의 '정권장악 성공'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가장 중요한 배경은 상황판단과 지원세력, 명분이었다. 김옥균의 갑신정변은 청군의 개입을 예상하지 못한 점, 일본 경비대 소수병력에 의존한 점, 개화사상 지지층의 미약, 민중의 지지 부재, 청국과 일본 등 국제정세에 대한 오판 등으로 실패했다.

특히 그가 소규모 군사로 정변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데는 고종의 암묵적 지지와 신뢰가 바탕이었다. 실제로 김옥균은 고종이 믿는 네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정변초기에 김옥균에게 협조했으나 대세가 기울자 등을 돌렸다. 고종의 변심은 유약한 성격에서 오는 기회주의적 속성일 수 있다. 그러나 정변 10년이 지난 뒤까지 김옥균을 추적해 암살한 것은 고종의 깊은 분노와 적대감에서 기인한 면도 있다.

고종은 어째서 지지하던 김옥균을 버렸을까? 이 점은 김옥균의 실패와 이토 히로부미의 성공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김옥균은 정변 첫날, 대궐에서 국왕의 중신 여섯 명을 살해했다. 고종이 가장 신뢰하는 환관 유재현을 가까운 거리에서 칼로 쳐죽였다. 조선시대에는 세조, 연산군, 광해군 때도 정변이 있었지만 국왕이 볼 수 있는 거리에서 그처럼 살육극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고종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김옥균은 정령(政令)을 발표하면서 내각제 실시를 전제로 정부 쪽 권력비중을 높였기 때문에 왕권약화를 두려워하는 고종과 민비의 반발과 분노를 샀을 것이다. (이 외에도 전술적 원인도 물론 있었다.)

이에 반해 '막부타도'와 '초기 정한론파 타도'에 성공한 이토 히로부미는 처음부터 '왕권강화'를 내세웠다. 왕실전범을 만들고 '국왕이 헌법을 내린다'는 의례절차를 골자로 헌법 발포식을 가졌다. 유럽 궁정의 의례 양식을 도입해 온갖 왕실행사를 화려하게 치렀다. 러일전쟁 뒤 대규모 개선 관병식을 열어 승전의 영광을 국왕에게 돌렸다. 막부타도 때부터 '왕권강화'를 명분으로 함으로써 힘을 얻은 셈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막부군은 일본 정부군이었지만, 왕의 지지를 잃는 순간 역적이 됐다. 반대로 천왕의 깃발을 든 사쓰마와 초슈의 쿠데타 세력은 정부군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은 '왕권강화'라는 깃발을 잡은 덕분에 성공했고, 갑신정변은 '왕권약화'를 내걸었기에 실패한 셈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운이 좋았고, 김옥균은 운도 나빴다.)

이 책은 격동기 역사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고종시대'를 중심으로 대원군, 고종, 이토 히로부미, 이홍장, 위안스카이(원세개), 김옥균 등 인물들의 성격과 전략, 판단 등을 한 축으로 한다. 이 인물들을 중심으로 갑신정변, 메이지유신, 병인양요,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격동기 굵직굵직한 사건의 배경과 진행을 살피고 있다.

책은 '고종시대의 위기가 유사이래 최대 규모였다면 그에 대한 응전의 규모도 비례했을 것이다. 위기관리 경험이나 시행착오의 사례와 교훈이 많이 축적됐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상식일 수 있다. 21세기 한국은 19세기 고종시대의 경험을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433쪽, 2만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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