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후 대구시의 한 고시원. 층마다 가로 2m·세로 3m 크기의 작은 방이 10여개씩 자리잡은 이 곳에는 TV와 소형냉장고까지 갖추고 있었다. 싼 값에 주거공간을 원하는 직장인·일용직 근로자들이 주로 찾는다는 이른바 '고시텔'. 그러나 화재에는 무방비 상태였다.
화재경보설비와 휴대용 조명 등이 있었지만 화재시 피난에 필수적인 통로 유도등은 보이지 않았다. 스프링클러도 없었다. 고시원 관계자는 "건물을 지었을 때 스프링클러 설치에 대해서는 얘기가 없었다"고 말했다. 한 취업준비생은 "고시원 화재 소식이 날 때마다 가슴이 섬뜩하다"며 "일대에서도 꽤 좋은 고시원으로 알고 있었는데 스프링클러조차 없다니 놀랍다"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화재 무방비, '벌집' 고시텔
고시원들은 창가를 따라 방을 내놓고 중앙에 빈 자리에서 방을 만들어 두고 있는데다, 통로의 폭마저 1m 정도로 성인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최소한의 폭만 통로로 내놓고 있었다. 이는 방이나 통로 크기에 관한 규정이 따로 없어 고시원 업주가 한정된 면적에 많은 방을 만들면서 최소한의 통로만 확보하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 이 때문에 경기도 용인 고시원 화재와 같이 고시원 한가운데에서 불이 날 경우 대피할 곳이 애초에 차단될 수밖에 없는 것.
대구소방본부에 따르면 대구의 고시원 숫자는 총 138개소로 이 중 중·남구와 북구에 100여곳이 집중돼 있다. 고시원의 경우 월 1회 소방당국으로부터 확인점검을 받고 있으며, 대피로 미확보 30만원, 소방시설 미설치 200만원의 과태료를 물도록 하고 있다. 대구소방본부 관계자는 "올들어 490차례 확인 점검을 했다"며 "주의 조치를 받은 곳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취재진이 25, 26일 둘러본 대구의 고시원들은 화재에 무방비한 상태였다. 방들이 다닥다닥 붙은 벌집구조와 좁은 통로는 대피조차 어려웠다. 고시원 방문과 방문 사이의 거리는 채 2m가 안됐으며, 방문을 열면 통로가 막혀버릴 정도였다. 경기도 용인 화재처럼 유독연기 발생시 다수의 피해자가 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고시원들이 최근 값싼 월세를 내세워 직장인이나 일용직 근로자 등을 위한 주거공간(일명 '고시텔')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더욱 취약함을 드러내고 있다. 좁은 방에 고시텔 생활자들의 옷가지나 짐꾸러미 등이 많아 유독성 연기를 뿜어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취약한 고시원 규정
'다중이용업소의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에는 화재 등 위급한 상황에 대비, 이용자가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도록 업주는 피난계단·피난통로, 피난설비 등을 표시한 피난안내도를 비치하거나 피난안내에 관한 영상물을 상영하여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이와 관련한 표시를 찾기 힘들었다.
북구의 또다른 고시원. 주출입구와 비상구를 제외하면 외부로 통하는 길이 없었지만 대피안내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런 취업으로 한달째 이곳에서 산다는 김모(29)씨는 "주인으로부터 한 번도 비상구 위치나 화재시 대피요령 등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관련법은 고시원에 비상구유도등, 화재감지기, 휴대용조명, 소화기 등을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화재 초동 진화에 효과적인 스프링클러 설치 규정은 없다. 지하층·무창(窓)층·4층 이상 건물의 바닥면적이 1천㎡ 이상일 경우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도록 돼 있으나 실제 대부분의 고시원은 규모가 이보다 작아 설치 대상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구소방본부 관계자는 "고시원들은 쪽방구조가 대부분이고 내부 자재도 화재에 취약한 경우가 많지만, 관련법에서는 이런 근본적인 문제까지는 규정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편, 대구소방본부는 경기도 용인 고시원 화재 사건을 계기로 28일부터 다중이용업소에 대한 특별점검과 소방안전교육에 나섰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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