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손종영은 경성고등상업학교(現 서울대 경제학부)에 재학 중이던 1944년 학도병으로 일본육군에 끌려갔다. 그 해 1월부터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까지 복무했다. 이 책은 지은이가 학병으로 끌려간 시점부터 해방과 제대, 귀국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의 체험을 묶은 수기로 1944년부터 1948년 여름까지의 이야기다.
지은이는 이 기쁘지 않은 수기를 반세기나 지나 쓰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들이 일제 강점기에 겪은 쓰라린 역사를 잘 모른다. 몰라서 그렇거나, 눈앞에 크게 그림을 그려 주지 않아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성인들도 해방 직후부터 지금까지 일본군에 갔다 온 학병에 관심이 없고, 학병이라는 말도 잘 쓰지 않는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몇몇 학병들이 귀국 직후 서울에서 학병회를 결성했는데 그것이 공산단체로 간주됐고, 다른 학병들까지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됐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사람들은 학병이라는 말을 기피했다."
지은이는 이 이야기가 결코 소설이 아니며 수기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소설이 아닌 수기로 기록하는 것은 죽기 전에 나의 기이한 경험을 남겨 고국의 여러분에게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를 식민지화했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 책이 조금이라도 역사적 가치가 있으면 다행이다"고 밝히고 있다.
수기 '학병'은 99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일상생활이나 훈련사항 등 누구나 짐작할 만한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또 오랜 세월이 지난 만큼 잊을 만한 것은 잊었고, 잊어버린 것을 (이른바 상처가 아문 부분을) 억지로 헤집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도 잊어버릴 수 없었던 사건이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썼다. 그래서 각각의 이야기는 극적인 느낌이 든다. 그러나 지은이는 "결코 과장이나 허구는 없다. 다만 인명, 지명, 부대명은 잊은 것도 있고, 또 여러 가지 이유로 가명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일제의 탄압 혹은 학병이나 징용자의 고달픈 삶에 대해서 조금씩은 알고 있다. 이 책 역시 '일제탄압과 고달픈 조선인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더불어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시절,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들어본 적도 없는 낯선 땅에서 살아야 했던 이야기다.
에피소드 중 하나인 '지바 평야의 조선 할머니'는 제 나라를 잃은 사람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잔잔하지만 슬프게 증언한다. 일제침략, 가미카제, 굶주림, 헛된 죽음, 폭력 등 거대한 폭력이 아니라 생활 곳곳에 편재하는 작은 폭력에 대한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무심한 눈으로 본다면 별 것도 아닌 이야기처럼 비춰질 수도 있다.
간부후보생이던 시절 지은이는 지바평야로 야외 기동훈련을 나갔다. 진지가 될 만한 장소를 탐색하는 실습훈련이었다. 그 무렵 시간이 조금 남아 일본인 후보생과 지은이는 시골구경을 나섰다.
지은이는 당시 할머니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타향에서 고생하느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 자신이 1948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생활하면서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10년이 지나면 고향에 돌아가지 마라!'
이민자들은 현지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어려워 불편한 점이 많다. 그러나 고국으로 돌아가서 사는 것도 쉽지 않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후에 좋은 날이 와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돌아가기 어렵다. 그들에게 떠난 지 10년이 지난 고향은 이제 낯선 땅일 뿐이다. 돌아간다고 해도 반길 사람이 없으며, 땅도, 직장도 없다. 고향이나 타향이나 떠돌이에게는 매한가지로 낯선 장소인 셈이다.
우리 민족만큼 수난의 역사가 많았던 민족도 드물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던 사람들이 세계 각처에서 이방인으로 살다가 죽었다. 설령 '전쟁은 끝났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는 셈이다.
몽고 침략 때 끌려간 사람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강점기에 끌려갔던 사람들은 낯선 사람, 낯선 땅, 낯선 물과 함께 살다가 죽었다. 더 우울한 것은 그들에게 '떠나온 고향'도 낯선 장소가 돼 버렸다는 점이다.
이 책 '학병'은 남의 전쟁에 동원됐던 한 남자의 이야기며, 고향을 떠나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은이 손종영은 1923년 생으로 일본학병으로 징집됐다가 해방 후 제대하고 귀국해 영어교사로 일했지만 1948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줄곧 미국방외국어대학에서 근무했다. 422쪽, 1만5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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