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우리는 해질 때까지 놀았다 양념한/ 염소 고기 숯불에 구워 뜯으며 흘러간 옛 노래를/ 힘차게 불렀고 老少同樂 뚱뚱한 배와 흐벅진 엉덩이/ 흔들며 요즘 가수들의 춤사위를 잘도 흉내냈다/ 나도 얼마나 흔들어댔는지 예술가는 과연 다르다고/ 칭찬까지 받았다 염소의 피냄새가 입 안에 그득했다"
이성복 시인의 '그날 우리는 우록에서 놀았다'라는 시의 일부분인데 읽는 순간 웃음이 절로 난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예술가로 호명되는 순간 누리거나 짊어져야하는 그런 짐들이 있다. 그런 면에서 위의 시구에는 예술가의 페이소스가 배어있다. 체질 탓인지 지천명에 접어든 세월이 흘렀음에도 나는 아직 남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반편이다. 살면서 부러운 점이 어디 한둘이겠는가마는 함께 어울리는 자리에서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그 중 하나다. 늦었다고 여겨질 때 시작하라고 했으니 이제부터라도 가락 몇 구절과 흔드는 엉덩이를 가져야겠다.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감전될 때가 있는데 나의 옹졸함이 아이들에게서 되풀이되는 모습을 접하는 순간이다. 남 앞에 쩔쩔매는 건 어찌도 그리 빼닮는지 진저리가 난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른의 스승이라는 말도 있지만 유전자라는 녀석이 소망은 전달하지 않고 실재만 이어주는 냉정한 놈이었다.
이런 못난 점들로 인생을 한탄하게 내버려두지 않으려 마음은 잽싸게 숫기 없고 소심한 성향을 위안할 무언가를 뒤적인다.
어릴 때였다. 열 살쯤 되었을까 호롱과 유리 등잔을 같이 쓰던 시골에서 내가 맡은 집안 일 중 하나가 유리 등잔에 묻은 그을음을 닦는 일이었다. 닦다가 실수로 유리를 깨트렸고 떨어질 아버지의 불호령이 무서워 뒷산으로 냅다 도망을 쳤다. 산에는 마침 밤나무를 심고 있었는데 어린 나는 일꾼들 틈에 끼어 죽어라 일을 도왔다. 그러면 아버지한테 조금 혼나겠지 하고. 나무를 심던 일꾼들이 "야가 와이카노, 니 몸살 나겠데이."했지 아마.
요즘 아이들은 제 몫만큼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효도하는 거지만 예전에는 어려도 밥값을 해야 한다는 집단 무의식이 있었나보다.
그때 심은 나무들이 벌써 고목이 되어가고 해마다 가마니를 채울 만큼 밤이 열리면 나는 시골로 내려가 툭툭 산밤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무 사이를 걷곤 한다. 밤나무가 있는 한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올해도 아버지가 보내주신 산밤을 까먹으며 아이들 앞에서 실없이 웃고 있다.
김창태(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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