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안고 있는 가장 아픈 상처는 건국과정에서 생긴 흑백 인종문제이다. 이로 인해 치열한 남북전쟁을 치렀으며 지금도 세계의 인권문제 논의에서 족쇄를 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미국이 232년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흑인 혼혈의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를 대통령으로 선택함으로써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관심은 오히려 증폭되고 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본산인 미국이 색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 우리로서는 어차피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걸쳐있고 나날이 예민해지고 있는 남북관계에 그의 정책이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오바마는 전통적인 미국 민주당을 업고 있으나 개인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뒤섞인 그야말로 "미합중국"이다. 요즈음 말로 한다면 정말 글로벌(Global)하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케냐 출신 흑인 남성과 캔자스 출신 백인 여성의 아들입니다. 저는 2차 세계대전에서 패튼 장군의 부대에 복무하여 대공황을 헤쳐 나온 백인 할아버지와, 그가 해외에 있을 때 포트 레벤워스 요새의 폭격기 조립공정에서 일하신 백인 할머니의 도움으로 자랐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하와이 푸나호우 초등학교, 하버드대학교 법학대학원-로스쿨을 마쳤고,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인도네시아에서 어린 시절을 살았습니다. 저는 흑인여성 미셸 오바마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노예들과 노예 소유주들의 피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소중한 두 딸들에게 우리가 넘기는 유산입니다. 저는 세 개의 대륙에 흩어져 있는 모든 인종과 모든 색조의 형제, 자매, 조카딸, 조카, 아저씨와 사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살아있는 한, 지구상의 어떤 다른 나라에서도 제 이야기가 가능하지조차 않을 것이란 점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재미있는 주인공인 자신을 미국 대통령으로 적임자라는 설명을 이렇게 한다. "저의 이러한 삶의 배경은 저를 가장 전통적인 대통령 후보로 만들지는 않았으나 이 나라가 단순히 부분의 合(합)이 아니며 우리는 여럿이긴 해도 진정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대변하는 후보로 만든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돌리는 설득력은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술의 하나이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변호할 수 있는 이런 솔직함과 재치가 보통의 미국인들을 사로잡았을 것이며 인종문제를 정면 돌파하면서 미국의 당면문제와 숨겨진 문제를 찾아서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로마시대 이후 연설정치를 중시하는 서구의 전통에서 오바마는 전 미국인을 사로잡는 연설로 힐러리와 매케인의 장벽을 넘어섰다. 그의 연설은 편견과 모함을 논리적이면서도 감성적인 말로 제압했고 현 정권의 실책을 비난하는 데 매달리지 않고 신중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넘어갔다.
우리도 지난해 이때쯤 국가 현안을 놓고 대통령 후보들의 연설을 들었다. 이 순간에 다시 아쉬워 지는 것은 우리의 심금을 울려준 슬로건이 무엇이었나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것은 '경제 살리기'를 하겠다는 현실적인 계산과 좌파정권의 말장난에 염증을 낸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뿌리를 짚고 우리 사회의 진정한 민심을 알아주는 진단과 그에 따라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커다란 비전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심에 맞지 않는 인사정책이 나오고 쇠고기 파동에 이어 남북문제가 꼬여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해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바마의 연설문을 읽어보면 지성과 논리가 있으면서도 보통사람 미국인들의 심정을 너무나 파고드는 정서가 담겨있다. 그가 구사하는 영어의 품격 역시 막말로 얼버무리는 원고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유명우(한국번역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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