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마감 후] 기억의 저주, 망각의 축복

서가에 꽂혀있는 책을 꺼내 폅니다. 분명히 몇 년 전에 읽은 책입니다. 펴보니 군데군데 밑줄까지 그어져 있고 어떤 쪽에는 연필로 끄적여 적은 나름대로의 주석도 있습니다. 그런데 당혹스러운 것은 도통 책의 내용이 생소하다는 겁니다. "도대체 이 대목에다가 무슨 생각으로 줄 그은 거야?"

TV 리모콘 버튼을 누르다가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되는 영화와 만납니다. 예전에 영화관에서 혹은 DVD로 본 영화들입니다. 그런데 이 역시 거의 대부분 장면들이 마치 처음 본 듯 생경합니다. 그러니 새 영화 한 편 보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길을 가는데 누군가가 반색을 하고 알은체합니다. 워낙 반가운 기색인지라 "아, 예! 잘 지내시죠"라고 화답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뭐하는 사람인지 도통 머리속에 정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늘상 마주하는 사람, 연예인, 스포츠 스타의 이름이 혀끝에서 맴돌 뿐 도통 떠오르지 않는 일이 허다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것을 외우고 받아들이는데 점점 더 많은 어려움을 느낍니다. 새로 기억하는 것보다 잊어버리는 것들이 더 많아집니다. 성인이 되고 나면 하루에 뇌 세포가 10만개씩 죽는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치매에 걸리지 않는 것은 태어날 때의 뇌 세포가 일백수십억에서 이백억 개나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퇴직했지만 선배기자 중에 기억력이 정말로 비상한 사람이 있습니다. 10년 전에 누구를 만나 취재를 했는데 그 사람이 한 이야기를 토씨까지 기억해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선배기자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는 과대기억증이라는 것도 있더군요. 질 프라이스(43)이라는 미국 여성은 14세 때부터 자신이 몇 시에 일어났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매끼 무얼 먹었는지 시시콜콜한 일상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놀라운 능력이라 부러워 해야할 것 같지만, 실상 그같은 기억력은 정작 본인에게 고통이라고 합니다. 매 기억에는 주관적인 감정과 인상이 달라붙어 있는데, 그녀의 경우 매 순간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과거의 사소한 기억들이 현재를 파고 들어와 괴롭다고 합니다.

쥐띠해 무자(戊子)년 한 해도 다 저물어갑니다. 올해의 마지막 주말판은 2008년을 되돌아보는 지면 위주로 만들어봤습니다. '유별난 2008년…사상 최대의 기록'이라는 기사(1면)를 필두로 해, 올해 매일신문 홈페이지(imaeil.com)에서 가장 많이 클릭된 기사들은 어떤 것들이었는지 찾아 실었습니다(5면). 와이드 인터뷰로 꾸민 '인물+'난을 거쳐간 62명의 사람들의 취재 후기도 6~7면에 걸쳐 다뤘습니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기자들이 당시 녹취를 다시 듣고 취재수첩을 뒤적였습니다.

올해는 유별스레 많은 일들이 우리 곁을 스쳐갔습니다. 개중에는 당장 세상을 아작낼까봐 걱정스러울만큼 엄청난 소용돌이를 낸 것도 있었고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닌데도 호들갑 떨게 만든 일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많은 것들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갔습니다. 잊어줄 것은 잊어줘야 하는 게 인생사. 어떨 때는 기억이 저주이고 망각이 축복일 수 있습니다.

이아무개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이현주 목사가 책에서 그러더군요. 영원한 것은 없으며 그 어떤 것들도 왔다가 언젠가는 사라지니까 손님처럼 아주 귀하게 대하라고. 힘든 시기이지만 언젠가 지나가고 좋은 날이 오겠지요. 올 한해 매일신문 주말판을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김해용 기획취재부장 kimh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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