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첫 우주인 탈락도 '큰 산'되는 성장의 한 축…우주인 고산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우주인 고산(33).

'슬럼독'의 주인공 자말이 살아온 험한 인생에 백만달러 퀴즈의 정답이 들어있듯 고산 역시 대학 이후 다양한 삶의 체험이 마치 대한민국 첫 우주인을 향해 걸어온 길 같았다. 물론 결론은 다르다. 자말은 마지막 문제에서 사회자의 막판 함정까지 피해가며 퀴즈쇼 최고의 자리에 올라 인도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줬다. 하지만 고산은 3만6천206명의 지원자 중 수십단계의 과정을 거쳐 최종 2인에 올랐다 최후의 1인이 됐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대한민국 첫 우주인 자리를 이소연에게 내줘야했다.

고산이 걸어온 길 중 특히 서울대 문리대 산악부 시절 해발 7,500m 파미르고원 '무스타크 아타'에서 극한 체험을 한 것은 첫 우주인에 한발 더 다가서도록 했다. 대구 남구 '캠프 헨리'에서의 카투사 복무 역시 강한 체력과 뛰어난 영어실력을 뒷받침해줬다. 대학 입학도 처음엔 원자력공학과로 들어갔다 다시 시험을 봐 수학과에 입학했다.

큰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도 '큰 산이 되어라'고 고산(高山)이다. 고산은 "이름이 고산이어서 고산병에 안 걸릴 줄 알았는데 파미르고원에 갔을 때 정말 힘들더라고요"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부산 사나이인 아버지는 고산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배를 타고 나갔다 바다에서 운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빈 자리는 어머니가 대신했다. '세상 누구보다 강인하고 믿음직한 대한의 아들, 고산'을 키워낸 것. 어머니는 고산이 첫 우주인 자리를 박탈당하고 전화했을 때도 단 1초도 주저하지 않고 "괜찮아! 건강하게만 오면 되지"라고 말해 아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었다.

고산은 또 이런 말을 했다. "전 어머니와 이런 통화라도 했는데, 본인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을 때 이런 얘기조차 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영재학교 강의보다 불우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우주에 대한 꿈을 심어주는 것을 더 보람되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해 12월 결혼한 고산. 서울대 수학과 동기인 아내는 미국에서 유학 중이다. 결혼하자 곧 대전 총각이 된 고산을 14일 그의 근무처인 한국항공우주연구원(KARI)에서 만났다. 우주인 고산에게 좀 더 가까이 가보자.

◆고산의 첫 느낌 '배려'

대구에서 대전 유성구 과학로 KARI에 도착하자 고산이 로비로 나왔다. 인터뷰 시작 전 목이 마르지 않느냐며 음료수를 사다주겠다고 했다. 질문 하나하나 숨김없이 또박또박 대답하면서 민감한 질문은 이렇게 해주시라고 정중하게 부탁하기도 했다. 왠지 인터뷰어(인터뷰하는 사람)가 인터뷰이(인터뷰 대상자)에게 배려받는 느낌이었다. 혼잣말로 '그래도 내가 고산보다는 두 살 위인데' 그랬다.

인터뷰 도중 다소 경직될 수 있는 질문에도 한발 물러나 대답하며 오히려 기자를 부끄럽게 하기도 했지만 1시간 내내 진지하면서도 편안한 분위기 속에 웃으며 얘기할 수 있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미래지향적으로 밝게 써달라"고 한마디 부탁한 뒤, 대전에 다시 오면 술도 같이 하자고 말했다. 고산은 또 물어봤다. "차를 안타고 오셨죠?" "네." 본인 휴대폰을 들더니 콜택시를 불러줬다. 연구원 주변에선 택시잡기가 너무 힘들어 자신 역시 밖에 나갈 때는 콜택시를 자주 이용한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인터뷰에 협조해줬다. 택시를 타고 대전역에 돌아갈 때도 그는 '조심히 가시고, 다음에 또 뵙자'는 숏메일 문자메시지까지 보냈다. 고산은 배려심 많고 시원시원했다.

◆우주인 탈락도 내몫

"분명 제가 마지막에 잘못한 부분이 있겠지요. 하지만 다 받아들여요. 아마도 막판에 이렇게 떨어진 것도 제 몫이겠죠. 우주인이 되기 위한 테스트를 한 단계 한 단계 통과할 때마다 '아마도 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과정에 충실하면서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불가능할 것 같은 도전을 즐기는 마음도 사실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라톤부터 시작해 최종 우주인에 뽑히기까지 과정을 전부 기록하고, 마라톤 등번호판 등은 간직해두고 있어요. 국가가 제게 준 소중한 기회였으니 이제 제가 나라의 발전을 위해 돌려줘야죠."

고산은 모든 국민이 궁금해하는 최종인 선발과정에서의 탈락도 자신이 더 큰 우주인으로 커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삼성에서 기밀을 빼내려 했다' '국가에서 여자 우주인을 밀었다' '국정원의 다른 계획이 있었다' '러시아와 외교관계 문제로 보복을 받았다' 등 각종 추측들이 난무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제가 할 말도 없고 후회도 없다"고 답변했다.

고산은 또 경쟁자이자 동료인 이소연과도 잘 지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생각 때문에 모든 걸 털어놓는 관계로 발전하지는 못했고, 충분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살짝 드러내기도 했다.

◆우주인이 되기 위한 과정, '흥미와 도전'

-우주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우주인 선발공고를 보고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주인이 된다는 데 대한 꿈과 도전정신도 있었지만, 그 과정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겠다고 판단해 참여하게 됐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들이 선발과정에서 많이 부합된다는 느낌을 받았고, 지금 우주인으로의 제 삶이 펼쳐진 것 같습니다."

-우주인 최종선발까지의 과정은.

"체력테스트-영어-면접-프레젠테이션-지적능력 테스트-의학검사-러시아에서 최종 선발 경쟁 등 단계별로 복잡한 선발과정이 숨어 있습니다. 제가 최종 10명에 선발될 때까지 '흥미와 도전정신'을 동시에 일깨우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다행히 최후의 2인이 선발될 때까지 저에게 결격사유가 될 만한 것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무중력 상태가 되면.

"수조에 물을 채우고 거기에 납덩이를 메고 들어가서 부력을 상쇄시키고 떠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만 물 같은 저항이 없지요. 아무리 발을 저어봐도 나가지 않습니다. 사실 우주유영 훈련을 할 때는 멀미가 많이 납니다. 무중력 비행기를 탑승하면 올라갔을 때 중력이 2배가 됐다 떨어질 땐 무중력(제로)이 돼 한 20번 정도 반복하면 두통과 구토가 날 정도로 어지럽습니다."

◆고산이 바라본 우주개발과 계획

-러시아의 우주개발 발전 정도는.

"러시아가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와 최초 우주인 유리 가가린이 미국보다 앞섰던 걸 보면 냉전시대에 러시아의 우주개발 발전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때 국가적으로 엄청나게 투자된 우주개발 인프라 등은 지금도 러시아의 우주개발에 큰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미국처럼 꾸준한 투자가 되지 못해 다소 발전 속도가 더뎌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우주발사체, 로켓, 위성은 각각 어떻게 다른가.

"우주발사체는 지상에서 우주를 향해 쏘아올리는 것이고요. 이번에 북한의 로켓 발사로 국민들도 많이 아실 텐데 로켓 맨 윗부분(3단계)인 뾰족한 곳에 탄두가 들어가 있으면 핵미사일 등 무기가 되고, 위성이 들어가면 위성 발사가 됩니다. 둘의 차이는 궤도의 차이입니다. 로켓 위성은 정해진 궤도를 향해 올라가며, 미사일은 어디를 타격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장거리를 포물선을 그리며 나아갑니다."

-우리나라 우주개발은.

"미래 국가경쟁력입니다. 전문가들에 의해 외압 없이 똑바른 길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우주개발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해 비상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연구원 내에서 정책기획부 국제협력팀으로 옮긴 것도 이런 부분에서 더 도움이 되고 싶어서였습니다. 이 분야에 대한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고요. 우주인 사업에 대해서는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고산의 '똘똘뭉친' 애국심

-러시아를 악착같이 공부한 이유.

"러시아에 6개월간 우주인 실전교육을 받는 동안 이소연씨를 경쟁자로 생각하기보다 다른 나라 우주인을 경쟁자로 생각했습니다. '니네들보다 내가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자존심이었습니다. 아마도 저의 개인공부였다면 그렇게 3, 4개월간 러시아어를 '죽어라'고 공부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렇게 러시아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니 3, 4개월 후에는 통역없이 러시아어로 교신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우주인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했고요."

-러시아에 있는 동안 에피소드는.

"우주 훈련 도중에 다른 우주인들과 함께 여름에 해양생활 체험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 흑해에 얄타라는 곳을 방문했는데요. 그곳에서 러시아의 마지막 로마노프 왕조의 별장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허리를 반토막내게 한 얄타회담이 이곳에서 일어났더라고요. 탁자에 스탈린-루스벨트-처칠의 명패가 있는데, '나라의 힘이 없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구나! 이렇게 낯선 장소에서…'라는 묘하고 서러운 감정이 복받치더라고요."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고산은?=1976년 서울 출생. 잠전초교, 아주중, 한영외고, 서울대 수학과 졸. 서울대 대학원 인지과학 석사. 대구 캠프헨리에서 카투사로 군 복무. 서울대 문리대 산악부 대장 역임. 축구부, 복싱부(FOS 소속) 등 동아리 활동. 삼성종합기술원 연구원 역임.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선임급 연구원. 2004년 전국 신인 아마추어 복싱선수권대회 동메달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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