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수 요한 대주교는 1942년 3월 23일 경북 경산시 하양읍 대학동에서 최석암(비오)씨와 김정식(막시마)씨 사이에서 4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하양본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하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최 대주교는 하양초교와 대구 대건중학교를 거쳐 경북고를 졸업했으며, 1961년 서울 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사제의 꿈을 키워나갔다. 신학교 학부 3학년을 마친 뒤 1964년 1월부터 1966년 7월까지 육군 하사로 군 복무를 했으며,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1970년 7월 5일 명동 주교좌 대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부제서품을 받았고, 1970년 11월 6일 계산 주교좌 대성당에서 서정길 대주교의 주례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후 신암본당과 대봉본당에서 보좌신부 직무를 마친 최 대주교는 1972년부터 4년간 영천본당 주임신부를 거쳐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이탈리아 로마의 포콜라레 사제학교에서 연수를 받았다. 귀국 후 1982년부터 대구대교구 관리국장을 역임한 뒤 1986년까지 신설 산격본당 주임으로 본당의 기초를 다졌다.
이후 1990년까지 대구가톨릭대 사무처장을 역임하고 논공본당 주임신부로 재임하면서 대구시립희망원장, 논공가톨릭병원장, 대구가톨릭정신과 병원장을 겸임했다. 1991년부터 1995년까지 경주 성동본당 주임신부를 거쳐 1997년까지 가톨릭신문사 사장, 2001년까지 대구평화방송 사장으로 재직했다.
2000년 12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최 대주교를 천주교 대구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하면서 시티피스 명의주교직을 부여했고, 2001년 2월 27일 성김대건기념관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주교서품을 받고 대구대교구 총대리로 보임됐다. 2001년부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을 시작으로 주교회의 이사, 복음화위원회 위원장으로 직무를 수행했다.
사회복지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최 대주교는 2004년부터 성요셉복지재단 이사장을 비롯해 들꽃마을, SOS어린이마을, 일심재활원, 안심원, 빠스카교화복지회, 대구가톨릭사회복지회 이사장 직무를 맡았다. 또한 2001년부터 학교법인 선목학원 이사장으로 재임하면서 교육사업에도 열정을 쏟았다.
2006년 2월 3일 최 대주교는 교황 베네딕토 16세로부터 교구장 승계권이 있는 대구대교구 부교구장 대주교로 임명됐다. 전임 교구장 이문희 바울로 대주교의 은퇴에 따라 2007년 3월 29일 대구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됐으며, 같은 해 4월 30일 '그리스도와 함께'를 사목 표어로 하여 천주교 대구대교구 제9대 교구장으로 착좌한 뒤 교구발전을 위해 헌신해 왔다.
특히 2011년 교구설정 100주년을 앞두고 교구시노드와 100주년 기념 성전, 100년사 편찬이라는 3가지 주요 기념사업을 확정하고 100주년이 교구가 쇄신하고 새롭게 도약하는 분기점이 될 수 있도록 모든 교구민의 동참을 호소해 왔다. 교구발전을 위해 힘을 다하던 중 뜻 밖의 중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교구를 위해 기도하던 최 대주교는 8월31일 대구 가톨릭병원에서 향년 67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